"칼에 찔려 발차기 했는데 내가 피의자"...아리송한 정당방위
묻지마 범죄 폭주 막으려면
서울 중랑구에 사는 직장인 김모씨(39)는 몇 달 전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진다. 자신의 집 앞에 무단 주차한 차주에게 사과를 요구한 게 발단이었다. 마사지샵 사장이란 사내에게 멱살을 잡혔다. ‘무조건 맞아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경찰이 올 때까지 맞았다. 그러나 경찰의 판단은 예상과 달랐다. ‘쌍방폭행’. 양쪽 다 폭행죄 현행범이란 얘기다. 목을 조르는 상대방의 팔목을 잡고 밀쳐낸 것도 폭행이란 설명이다. 정당방위라고 항의하자, 법정에서 다투란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양쪽 다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한 달 뒤 기소유예 통보서가 날아왔다. 범죄 혐의가 있지만 서로 처벌을 원치 않으니 재판에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김씨는 “상대방은 회사원 월급으로 변호사나 선임할 수 있냐며 놀리는데 화가 나지만 법정까지 가기엔 부담이 컸다”며 “살기 위해 한 행동도 법정에서 인정받으란 건 범죄자가 되라는 얘기”라고 한탄했다.
크게 다치지 않은 김씨는 그나마 다행이다. 대전 동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30대 남성은 지난 5월 ‘묻지마 칼부림’을 당했다. 자신의 편의점 앞에서 술 취해 잠든 70대 남성을 깨운 게 화근이었다. 잠에서 깬 70대 남성이 갑자기 흉기를 꺼내 휘두른 것이다. 예상치 못한 칼부림에 허벅지를 찔린 편의점주는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했다. 얼마 안 가 문자가 왔다. ‘용감한 시민’이나 ‘의인상’ 같은 포상 안내가 아니었다. 검찰에선 오히려 ‘상해사건 피의자’란 문자를 보냈다. 칼에 찔린 사람도 검찰에 출석해 형사 조정 절차를 밟아야 하는 셈이다. 해당 편의점주는 “이게 정당방위가 아니면 뭐냐”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억울한 사례는 이들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연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최근 서울 신림동과 경기 분당 서현역에서 연이어 벌어진 흉기 난동 사건을 계기로 공분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누구나 흉악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자 정당방위를 남의 일로만 여기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정작 명확한 기준을 찾아보긴 힘들다. 형법에서 정당방위를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어서다. 우리 형법 21조에선 정당방위를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라고 규정한다. 범죄자의 체격이나 위협 강도, 무기 종류 등 실제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보니 구체적으로 정해 놓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법정에 가서 판단 받으란 얘기다.
덕분에 범죄 현장에선 정당방위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경찰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경찰 스스로도 범죄자에게 적극 대응하다간 과잉 진압으로 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받는다는 푸념이 나온다. 이에 지난 7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경찰의 물리력 행사에 정당행위·정당방위를 적극 적용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선 경찰관들 사이에선 “마루타가 되기보단 사례가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안전하다”는 반응이 중론이다. 여전히 ‘한 대 맞았으면 한 대만 때려야 한다’라거나 ‘똑같이 무기 들고 싸우더라도 범죄자가 무기를 내려놓으면 나도 무기를 내려놔야 한다’는 등 최소한의 대응이 최선이란 얘기다.
하태인 경남대 경찰학과 교수(한국형사법학회 이사)는 “최근엔 법원에서도 정당방위를 폭넓게 보고 있다고 하지만, 범죄 상황을 제삼자의 시각에서 보려고 한다는 게 문제”라며 “피해자가 느낄 불안감은 지켜보는 사람과 다른데 객관적 시각을 강조하니 테이저건을 쏠 때 어디를 조준했는지 따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당방위 행위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정당방위에 인색한 상황을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법과 제도가 국민의 법 감정과 동떨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건 범죄자를 돕는 것이란 얘기다. 형법상 정당방위는 자기 자신의 안전뿐만 아니라 제삼자를 지키기 위한 행위도 포함하고 있어서다. 지금처럼 피해자 본인조차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어려우면 남의 일에 나서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김병수 동의과학대 경찰행정계열 교수는 “범죄자에게 가혹했던 19세기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서 만들어진 범죄자 인권 철학을 시대가 변한 21세기에도 유지하고 있으니 사회가 더욱 흉흉해진다”며 “사법부에선 정당방위의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하고, 경찰은 수사 단계부터 정당방위 매뉴얼에 부합하면 수사를 종결해야 시민들이 서로 돕는 사회 안전망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공권력이나 사회 공동체에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니 일반인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에 나섰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호신용품을 구비하는 사람들이 급증한 것이다. 최근 국내 온라인 쇼핑몰 검색 상위권엔 호신용품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호신용품도 정당방위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실제로 지난 2021년 울산지방법원에선 맞기도 전에 호신용스프레이를 뿌린 50대 남성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기도 했다. 일반인들 입장에선 호신용품을 언제, 얼마나 써야 처벌받지 않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한 호신용품 판매업자는 “위급한 상황에서 범죄자가 크게 다치지 않도록 사용량이나 강도를 조절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어려우니 관련 문의가 늘었다”며 “판매자도 구체적으로 답해주기 어려운 처지”라고 말했다. 이 판매자는 ‘호신용품 사용으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당사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경고를 판매 사이트 한 쪽에 적어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적극적으로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영국과 미국 등 해외 사례를 부러워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정당방위 개념이 탄생한 영미법계 국가에선 흉기를 든 도둑은 물론, 실수로 사유지를 침범한 무단침입자를 사살해도 무죄 판결을 받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지에선 오히려 과도한 정당방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법체계가 달라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하태인 교수는 “우리의 법체계는 미국의 정당방위 규정(수정헌법 제2조)과는 달리 국가가 먼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 개인이 방위하는 체계”라며 “개인의 총기사용도 허용하는 미국처럼 될 수는 없지만 국민의 안전보장을 위한 정당한 공권력 행사 범위를 확대하고, 범죄 방지에서 국가가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경우 적극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수능 폐지 외치는 수능 창시자 “지금 수능, 공정하지 않다” | 중앙일보
- "학생, 그냥 타" 기사 배려에…버스 회사에 '통 큰 보답' 한 부모 | 중앙일보
- '바다의 산삼' 전복값 반토막 났다…엎친데 덮친격, 어민 울상 왜 | 중앙일보
- 일론머스크 두 아이 낳고 결별…35세 여가수 "인생 최고 인턴십" | 중앙일보
- 회식 중 캐디 볼 꼬집고 추행…"기억 안나" 30대 마스터 집유 | 중앙일보
- "박수홍, 막냇동생 증언에 흐느껴"…다음 재판, 모친이 법정 선다 | 중앙일보
- 尹 부부도 이재명도 노린다…테러에 몸떠는 정치권의 업보 | 중앙일보
- 20초 얼어붙은 81살 의원, 결국 퇴장했다…美 장로정치 논란 [세계 한잔] | 중앙일보
- 잼버리 4만명 '한국어 떼창'…월드컵 경기장 뒤흔들었다 | 중앙일보
- '갈비뼈 사자 논란' 부경동물원 결국 운영 중단…동물들 어디로?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