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바르샤바는 지옥이 됐다…우크라戰 읽는 또하나의 관점 [Focus 인사이드]
혹독하게 지배받은 나라
1942년 가을까지만 해도 점령지ㆍ괴뢰국ㆍ동맹국ㆍ우호국을 제외한다면 히틀러에 대항하는 세력은 영국과 소련밖에 없었다. 뒤늦게 참전한 미국은 아직 유럽 전역에 대한 영향력이 없다시피 했다. 그해 겨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뒤 독일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패망 3개월 전까지도 본토 밖에서 싸움을 벌였을 정도로 많은 곳을 지배했다. 그런데 당시 나치는 점령지를 상당히 혹독하게 지배했다.
전쟁 중에는 배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점령지의 민심을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민사작전의 원칙이다. 하지만 편협한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독일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탄압과 착취만으로도 부족한지 학살과 파괴가 일상이었다. 전선에만 집중해도 이길까 말까 한 전쟁 중 후방 관리에 많은 군사 자원을 투입하는 독일의 잘못된 정책은 결국 전쟁에서 패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이 점령한 기간은 전선의 변화 때문에 짧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5년이 넘을 정도로 지역마다 상이하다. 나치의 지배가 혹독했기에 당연히 오랫동안 지배를 받은 곳은 그만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폴란드는 제2차 대전 발발일인 1939년 9월 1일 나치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았던 나라다. 그러면서도 종전 직전에 완전히 해방됐을 정도로 오랫동안 나치의 잔인한 지배를 경험했다.
한 달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전사자가 6만이었지만, 이후 5년이 넘는 독일의 강점기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제명까지 살지 못하고 죽어간 폴란드인들이 600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정도다. 그중 300만의 국민이 단지 슬라브인ㆍ유태인 등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했다. 그에 못지않게 파괴도 심각해서 폴란드가 전쟁 전의 수준으로 복구되는데 15년의 시간이 걸렸을 정도였다.
자력 해방을 시도하다
이러한 독일의 혹독한 탄압은 수시로 폴란드인의 저항을 불러왔다. 그중 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이어진 바르샤바 봉기(Warsaw Uprising)는 비록 비극적인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가히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라 할 만한 사건이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작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폴란드의 행보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질긴 악연을 엿볼 수 있는 비극의 역사이기도 하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은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바그라티온 대공세를 시작했다. 정확히 3년 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날짜를 일부러 골랐을 만큼 의지가 강했다. 150만의 소련군이 벨라루스 일대를 담당하던 60만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일거에 붕괴시켰는데, 이는 전쟁 중 독일이 당한 최대의 패배였다. 이후 소련군은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밀물처럼 진입하기 시작했다.
7월 중순이 되자 선두에 섰던 제1벨라루스전선군이 바르샤바 부근까지 다가왔다. 이제 폴란드의 해방은 목전에 다가와 보였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의 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소련은 지난 1939년 9월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한 뒤 분할ㆍ점령했던, 또 다른 침략자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카틴 숲 사건처럼 학살극을 자행하며 독일 못지않게 폴란드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개시된 뒤 공산주의 계열 폴란드인들이 소련군에 협조하고 있었지만, 소련이 폴란드를 해방한다면 새로운 지배자 노릇을 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이에 런던에 있던 망명 정부와 협조 관계인 민족주의 저항 세력의 주도로 소련군이 진입하기 전 바르샤바를 해방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싫든 좋든 가까이 다가온 소련군과 사전 교감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폴란드 저항 세력은 머지않아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진입할 것이 확실하다는 전제하에 8월 1일 항전을 시작했다. 2만명의 저항군이 독일군을 급습해 주요 시설을 장악하자 이에 고무된 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가담하면서 급속히 세를 불려 나갔다. 하지만 무기고를 점령하지 못해 저항 세력은 규모보다 정작 무장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단지 소련군이 진입하기 전까지 버티면 된다고 낙관했다.
그럼에도 이어진 정신
반면 독일은 2선급 전력이던 폴란드 주둔군 대신, 바로 앞 소련군이 있었음에도 중무장한 정예 병력을 즉각 파견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 폴란드인이면 무조건 죽이고 모든 건물은 파괴하라는 잔인한 명령이 떨어졌다. 바로 그때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바르샤바가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음에도 가까이 다가와 있던 소련군이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했던 것이다.
더구나 제1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로코솝스키는 폴란드계로 훗날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국방장관까지 되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소련군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독일군 전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이후 통치에 방해가 될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 비스와 강 일대에서 선두 부대가 괴멸당했을 만큼 당시 소련군은 공세종말점을 지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 봉기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화력에 제압됐고 10월 2일 항복했다. 그렇게 막을 내린 63일간의 눈물겨운 저항 동안 20만명의 시민이 비참하게 죽었고 동유럽의 파리라고 불린 바르샤바는 전후 새롭게 도시를 재건해야 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소련군은 이듬해 1월 17일 완전히 폐허로 변한 역사적인 고도를 유유자적하게 진입했다.
그래서 저항 세력이 소련군의 상황과 움직임을 정확히 판단한 뒤 행동에 나섰다면 좋은 결과를 얻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한 후에 바르샤바 봉기에 나섰던 민족주의자들을 색출해 처형하고 괴뢰 정부 수립에 나섰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설령 자력으로 바르샤바를 탈환했어도 소련의 간섭과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바르샤바 봉기의 정신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다. 1956년 포즈난 저항, 권위주의적으로 변한 고무우카 타도에 성공한 1970년 12월 항쟁, 그리고 냉전 붕괴의 전주곡이 되었던 1980년 자유노조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비록 당시에는 실패한 투쟁으로 보였으나, 1944년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폴란드인이 흘린 피와 눈물은 시나브로 역사를 거대하게 바꾼 장엄한 불씨였던 것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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