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누구에게나 시원할 권리는 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저서 ‘위험사회’에서 “부(富)에는 차별이 있지만, 스모그(smog)에는 차별이 없다”고 표현했다. 기후변화, 재난, 핵발전소 사고 등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스모그처럼 계층과 국경 등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동등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실제로 기후변화는 전 지구적 현상이 됐고, 세계 곳곳에서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불볕더위에 누구나 고통을 받고, 사람들의 삶의 질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재난은 민주적이지만은 않다. 부의 정도에 따라 폭염 피해가 ‘위계’로 작용한다. 가난한 자들은 폭염에 더 큰 고통을 받는다. 한국환경연구원의 ‘2020 폭염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1만명당 온열질환 발생률은 저소득층(의료급여 수급자)의 경우 13.8명이었다. 반면 고소득층(5분위)은 4.8명에 불과했다. 저소득층이 폭염으로 인해 건강상 문제를 겪을 확률이 고소득층보다 3배가량 높은 셈이다. 2018년 저소득층은 1만명당 21.2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했다. 반면 고소득층에서는 1만명당 온열질환자가 7.4명에 불과했다.
국내 취약계층은 통풍이 잘되지 않는 낡고 좁은 집이나 반지하, 쪽방, 옥탑방, 고시원 등에 거주한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 같은 냉방기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한여름 쪽방의 최고온도는 35도에 달한다고 한다.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보다도 평균 3도 정도 더 높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무더위 쉼터를 가동하고 있지만, 거동이 불편하기라도 하면 한창 달궈진 아스팔트 도로를 뚫고 이동하기조차 쉽지 않다. 급격하게 인상된 전기요금이 두려워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않는다는 취약계층도 많다. 대형 쇼핑몰이나 카페로 가 더위를 잠시 피할 수 있다지만, 돈이 없으면 꿈도 꿀 수 없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자격도, 돈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셈이다.
폭염은 식료품 가격에도 영향을 미쳐 먹고사는 부담마저 가중한다. 수급 불균형이 발생해 농산물 가격을 상승시키고 가계 지출액을 늘린다. 배추의 경우 일평균 기온이 1도 오르면 소매가격은 전일 대비 289원 증가한다고 한다. 월평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743원 늘어난다. 2018년 8월 월평균 기온이 1.8도 오르자 가구당 가계소비 지출액은 441원에서 1363원까지 추가로 발생했다. 저소득층일수록 가격 상승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2018년 폭염을 태풍이나 홍수처럼 법적인 ‘자연 재난’으로 분류했다. 폭염으로부터 누구나 안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다시 말하면 국민은 소득과 상관없이 누구나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미 해외에서는 폭염으로부터 고통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2020년 스위스의 64세 이상 여성 약 2400명으로 구성된 한 단체는 “폭염 피해를 키웠다”며 유럽인권재판소에 스위스 정부를 제소했다. 정부의 미온적 대처로 기후변화가 나타나 폭염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고령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며 기본권 침해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행사가 전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된 것도 주최 측이 참가자들에게 시원하게 휴식을 취할 공간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기본권 침해가 주요 원인이었다.
국내에서도 열기로부터 생명이나 건강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적극 논의해야 할 때다. 국내에서는 쿨매트나 선풍기 등 효율성이 낮은 냉방용품을 지원하는 것이 사실상 ‘냉방 복지’의 전부다. 취약계층이 사용한 전기요금을 할인해주는 ‘에너지바우처’ 제도도 있지만, 한도가 낮고 혹한기에 맞춰 만들어진 정책이라는 점에서 실효성이 떨어진다. 최근 정치권이 쪽방촌을 방문해 에너지바우처 한도를 상향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당장 더위를 식힐 에어컨조차 없는 이들에게 냉방기기를 돌리다 나온 전기요금을 조금 더 깎아준다고 생색내는 정책이 무슨 소용일까. 차라리 그 예산으로 쪽방 등 취약계층 거주 공간에 창문형 에어컨을 설치해주는 게 효율적이다. 정부가 가전업체와 협력해 에너지 효율성이 높은 창문형 에어컨을 취약계층에 빌려주고, 여름철이 지나면 다시 수거하는 식으로 지원한다면 만족도는 훨씬 높을 것이다. 기본권의 시각에서 폭염을 바라본다면 탁상행정을 넘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전성필 산업1부 기자 f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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