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제조업 공백' 북미로 떠난 韓 제조업
첨단산업 회귀시키겠다
美에 1조원 이상 투자 韓 기업만 9곳
투자 예정 금액만 100조원 넘어
숙련 노동자 부족·제조 인프라 갖춘 부지 희소
美 진출 '가야할 길'이지만 고군분투 필요
"공장을 본 적조차 없는 근로자들에게 제조 설비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고임금에다 높은 교육 비용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국내 기업들의 고충이죠."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한 대기업 임원 A의 말이다. 한국 제조 기업들은 첨단 산업을 자국으로 유치하려 막대한 보조금을 풀고 있는 미국으로 떠나고 있다. 수십년간 대규모 제조 산업이 없었던 미국에 다시 제조업을 뿌리내리기 위해 우리 기업들의 고군분투하고 있다.
10억달러(약 1조3150억원) 이상을 미국·캐나다 등 북미에 투자할 계획인 국내 기업들은 9곳이다. 삼성전자가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2조355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SK하이닉스도 150억달러(약19조 7250억원)를 들여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장과 R&D(연구개발) 센터를 짓겠다는 청사진을 세웠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각지에서 완성차와의 합작 및 단독 공장 8개를 신·증설하고 있는데 투자 규모가 188억5000만달러(약23조9620억원)에 이른다. 현대차도 조지아주에 총 105억 달러(약 13조 8075억원)를 투자해 전기차·배터리 생산 공장 등을 만들기로 했다. SK온·삼성SDI·LG화학·한화솔루션·포스코퓨처엠등도 10억달러 이상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이들 9개 기업이 향후 투자하는 금액만 805억1000만 달러(약 105조 8706억원)에 이른다.
'제조 공백'이 만든 인력난
한국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계획한 것은 미국 정부의 천문학적인 보조금 정책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첨단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수백 조 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이다. 돈을 뿌릴 법적 근거도 만들었다. 바로 반도체지원법(CSA)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다. 법에 따라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산업의 공장을 짓기만 해도 25~30% 이상의 투자금을 다이렉트 페이 방식, 즉 현금으로 돌려준다. 여기에 전기차는 한 대당 최대 7500달러(약 986만원)의 보조금을 구매자에게 지급하고 배터리·태양광 모듈 등은 생산할 때마다 보조금을 지급한다.
판이 커진 미국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은 '쩐의 전쟁'을 펼치고 있지만 현지 사업에는 제약이 많다. 수십년간의 '제조업 공백'으로 인해 미국 내 제조 인적·물적 인프라가 제구실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공장을 돌릴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 김경훈 SK온 CFO(최고재무책임자)는 미국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현지 생산이 녹록치 않다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미국 내)배터리 엔지니어·생산직의 인력풀은 작은데 수많은 자동차, 배터리 회사들이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며 "미국은 제조 분야의 공백이 수십 년 동안 이어져 현지 인력을 교육하는 것 또한 많은 난관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의 미국 현지 법인장은 "미국 주재 모 한국 공관에 입사한 운전기사가 3개월 만에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스카우트돼 갔다"며 "(제조업뿐만 아니라) 뉴욕 등 미국 대도시는 완전 고용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 있는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해 미국으로) 많이 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숙련된 생산직은 생산 수율(생산품 중 완성품 비율)과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각 기업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숙련된 노동자를 구하기 위한 경쟁이 심해지고 현지 인력난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교육과 관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박철완 서정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배터리 생산 공정은 자동화율이 낮을뿐더러 숙련된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며 "국내와 동일한 엔지니어, 장비, 공정을 해외 공장에 그대로 옮겨 놓아도 초기에 수율이 높지 않은 것은 생산직의 숙련도 차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가 짓고 있는 미국 애리조나 공장은 인력 부족으로 당초 계획보다 준공이 1년 늦어질 전망이다. 류더인(마크 리우) TSMC 회장은 2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반도체 설비 장비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전문 인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N4(4나노에 해당) 공정 제품의 생산 일정은 2025년으로 미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인력난 속에 미국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은 고공행진 중이다. 1년 동안 한 직장에서 일한 미국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은 지난해 11월 전년 대비 5.5% 올라 25년 전 미국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이 관련 통계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재는 5.7% 수준을 보이고 있다. 1년 새 직장을 옮긴 노동자(이직근로자)들의 임금은 같은 기간 7.7%까지 올랐다. 현재도 7% 수준에 이른다.
드넓은 북미서도 교통·숙련공 접근성 갖춘 부지 찾기 힘들어
교통·수도·전기 등 제조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면서 숙련된 노동력을 구할 수 있는 공장 부지도 구하기 힘들다. 한국은 물론 현지 기업들도 '메가사이트'(대형 부지)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메가사이트란 교통, 저비용 에너지, 인근의 숙련된 노동력 공급이 갖춰진 면적 1000에이커(405만㎡) 정도의 넓은 부지를 말한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도 메가사이트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수십억달러 규모의 공장을 지을 수 있는 부지는 많지 않다. 빈땅은 있지만 외진 곳이라 철도 연결에 6년이 걸리고, 수도·전기 등을 설치하는 데 2~3년이 걸리는 식이다. 반대로 교통, 생활 인프라를 갖춘 대도시 주변에는 공장을 지을 대형부지가 없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차로 1~2시간은 떨어진 교외지역을 공장 부지로 선정하고 있다. 이런 곳에선 숙련된 노동자를 구하기 힘들다.
미국이 만들기 쉬운 화석연료 발전소 대신 친환경 발전소를 짓고 있어 공장에 사용할 전력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 폭스바겐의 오프로드 자동차 브랜드인 스카우트 모터스는 지난해 여름 20억달러(2조6000억원) 규모의 공장을 짓기 위해 미국 내 74개 부지를 조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지는 철도 연결에 수년이 걸리고 필수적인 청정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없거나 인근에서 숙련된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었다. 결국 처음 계획했던 대로 면적 2000에이커(809만㎡)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1600에이커(647만㎡)의 사우스캐롤라이나 부지에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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