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사서 하는 고생
얼굴 익어가도 은은한 미소만
마음 열게 되는 낭만 찾았기에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시기가 되면 주섬주섬 짐을 싸는 나에게 어머니는 매해 물었다. “그놈의 페스티벌은 왜 꼭 이렇게 더울 때 하니?” 그러게 말입니다. 수십 년을 반복해도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올해도 그저 묵묵히 짐을 쌌다. 다만 흔히 말하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좀 더 고급스럽게 말하자면 경험치로 쌓인 연륜 때문에 짐도 스케줄도 상당히 간소화됐다는 점을 어머니에게 꼭 강조하고 싶긴 했다. 돗자리는 짐이 되니 무조건 초경량 초소형으로, 낮에는 옆구리에 껴 열을 식히고 저녁에는 마실 수 있는 얼음물 두 병과 수건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니 꼭 챙긴다.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헤드라이너 공연을 온전한 정신으로 끝까지 보고 싶다면 체력 소모가 심한 한낮을 피해 늦은 오후쯤 페스티벌 장소에 도착하는 꼼수도 중요하다.
이쯤 되면 어머니가 아닌 누구라도 ‘왜 그렇게까지’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음표를 뚫고, 지난 주말 ‘2023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성황리에 열렸다. 8월 4일에서 6일까지 사흘 동안 열린 축제엔 페스티벌 역대 최다 관객인 15만명이 몰렸다. 사흘 내내 평균 기온 섭씨 35도를 넘긴 아찔한 무더위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야속했지만, 관객들은 이미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인천으로 향한 이들이었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은 사람을 오히려 불타오르게 만드는 법. 커다란 음량으로 너른 공터를 쿵쿵 울리는 악기 소리에 맞춰 대낮부터 온몸을 내던져 슬램과 서클핏, 기차놀이에 심취한 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차마 동참하지는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들과 공연장에 배치된 의료쿨존 컨테이너, 의료쿨링 버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문득 이 말을 떠올렸다. 아, 이게 그 유명한 ‘사서 하는 고생’이구나.
지금은 효율의 시대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지난해 발간한 저서 ‘회복력의 시대’를 통해 “역사의 중심축이 진보와 효율성에 집중했던 시대를 넘어 회복력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고는 하지만 글쎄, 적어도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는 아직 적용되려면 한참이나 먼 이야기구나 싶을 뿐이다. 소위 말하는 ‘가성비’로 모든 일의 성공과 실패, 때로는 도덕적 가치 판단까지 쉽게 재단해 버리는 현실 속에서 ‘사서 하는 고생’이란 분명 이론적으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사상일 것임이 틀림없다.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이 최소 같기라도 해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는 깐깐한 수식 속에서 고생의 비중은 작으면 작을수록 높은 점수를 받기에 유리한 요소였다. 그런 세상에서 땅속 깊이 묻힌 고생을 굳이 찾아, 굳이 파내어, 굳이 온몸에 끼얹고 있는 한 더미의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눈앞의 풍경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점점 익어가는 그들의 얼굴에도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띄워져 있다는 걸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낭만이었다. 낭만은 현실에 매이지 않는 것을 시작점으로 한다. 사우나처럼 후끈해진 공기도 아랑곳하지 않는, 하루 종일 시끄럽게 울려대는 음악을 누구도 소음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줄줄 흐르는 땀을 맥주로 끝없이 채우는, 한여름의 명절처럼 반가운 음악과 사람은 물론 평소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에도 나도 몰래 활짝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그런 낭만. 그렇게 효율이라곤 1그램도 없었던 사흘이 지나고, 내 기억엔 한낮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시원하게 불던 저녁 바람 한 줄기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화음을 맞추던 떼창 한 자락만이 남았다. 내년 여름이 되면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다시 짐을 싸며 또 이 모든 고생을 사서 할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또 물을 것이다. ‘도대체 그놈의 페스티벌은 왜 꼭 이렇게 더울 때 하니?’ 그 상황에 놓일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란 건 이 사서 하는 고생의 든든한 희망이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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