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20년도 넘은 아파트로 이사 후 벌어진 필연들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반구형 문진을 선물 받았다. 투명한 유리 구술 같은 문진 안에 숲이 있다. 온통 초록인 세계, 바람이 부는지 나뭇잎이 넘실거린다. 그 풍경이 눈에 익다. 언젠가 내가 보았고 사랑했던 숲과 닮았다. 마치 잃어버렸던 물건을 되찾은 듯, 잊혔던 숲이 알맞게 돌아온 듯 반갑다.
삼 년 전 전세 살던 집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급하게 이사를 했던 경험이 있다.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매물이 나오면 보지도 않고 계약이 성사될 정도로 부동산 열풍이 불었다. 매매도 그랬지만 전세도 매물 자체가 귀했다. 이사 날짜는 다가오는데 갈 집은 없고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당시 간신히 계약한 집은 무척 낡아 있었다.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은 아파트인데 그 사이 한 번도 수리를 하지 않은 상태. 운 좋게 우리가 들어갈 때 싱크대 교체와 거실 화장실 수리, 그리고 도배를 해주겠다는 조건이 있어 창 밖 풍경만 믿고 계약했다.
▲ 창 밖 풍경 거실 창의 절반은 하늘이, 나머지 절반은 다홍색 지붕의 학교와 숲이 채웠다. |
ⓒ 김현진 |
살고 있던 동네라 지형을 알아 집의 베란다에서 보이는 경치가 꽤 근사할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단지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층수가 높아 하늘이 훤히 보였다. 거실 창의 절반은 하늘이, 나머지 절반은 다홍색 지붕의 학교와 숲이 채웠다.
그걸 배경으로 두는 삶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내부가 낡아 계약을 하고도 걱정이 많던 남편에게 남서향이라 저녁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울 거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해가 저무는 풍경을 감상하는 생활을 상상했다.
이사를 하고 보니 베란다 아래로 생각지 못한 작은 공원이 있었다. 공원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크기라 오솔길이라 하는 게 더 적당하려나. 그래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나무가 우거져 커다란 숲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해가 서편으로 넘어갈 때면 바람이 숲을 쓸고 가는데 그때마다 푸른 잎사귀들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고 푸른 융단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창백한 아파트 건물 사이에 있지만 집에 들어와 창 밖을 보는 순간 숲에 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봄이면 작은 숲에 여린 초록의 잎사귀들이 돋아나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켰고 그 너머로 보이는 산책로를 따라 벚꽃이 만발했다. 여름이면 작은 숲이 깊고 짙은 초록의 바다로 무성해졌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하게 물이 들고 겨울에는 검게 빈 숲에 흰 눈이 쌓였다. 그곳을 나만의 작은 숲이라 불렀다.
봄날이면 베란다에 테이블을 펼치고 피크닉 나온 사람들처럼 저녁을 먹었고 여름이면 간이 풀장을 설치해 물놀이를 했다. 아이와 둘이 창 앞에 나란히 앉아 저녁노을로 시시각각 물들어가는 하늘을 지켜보거나 흘러가는 구름을 헤아렸다.
창 밖의 풍경과 베란다 아래 작은 숲은 애초에 바랐던 것 이상으로 삶을 바꾸어 놓았다. 매일 해 지는 시간을 기다렸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늘을 챙겨 보았으니 그 집에 살던 2년은 자연과 계절의 흐름과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
선택 둘, 책과 도서관과 가까이 있는 삶
거기 살면서 새롭게 알게 된 도서관이 '어울림 도서관'이다. 집에서 더 가까운 도서관을 찾았을 뿐인데 이전에 다니던 곳보다 시설이 좋고 더 다양한 책을 갖추고 있어 이런 행운이 또 없다고 생각했다. 삶이라는 원에서 창 밖 풍경이 원주라면 책은 원점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집에 책이 많아도 책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이사를 하며 책이 큰 짐이라는 걸 알게 된 후 구매를 자제하게 되었고 가능하다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게다가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 서비스를 이용하면 한 달에 5권까지 신간 도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작년 여름에는 우연히 '치유하는 글쓰기'라는 도서관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마침 3년 가까이 이어온 매일 글쓰기가 지지부진한 상태였고 글은 써서 뭐 하나 하는 회의에 젖어 있었다. 혼자 쓰는 일이 답답하던 차, 누군가와 함께 쓰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냉큼 신청했다.
▲ 문진 선물받은 문진 안에 작은 숲이 있다. 언제가 내가 보았고 사랑했던 그 숲이 있다. |
ⓒ 김현진 |
얼마 전 글쓰기 모임 1주년을 기념하며 멤버들끼리 작은 선물을 교환했다. 그때 내게 온 선물이 문진인데 나를 모임으로 이끌어 준 베란다 앞 숲이 그 안에 있다. 신기하다. 모든 선택은 우연이었던 게 분명한데 지나온 과정을 더듬어보니 필연처럼 연결된다.
창 밖의 하늘과 숲이 좋아 이사를 결정했고 그 덕분에 도서관을 알게 되었다. 도서관을 부지런히 드나들다 글쓰기 친구들을 만났고 나와 다른 20대, 30대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반경이 조금씩 넓어지는 기분. 그 집으로 이사를 가고, 도서관 수업을 들었던 우연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삶은 예측불가하고 알 수 없는 우연의 이끌림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무수한 우연 속에서 기어코 의미를 만들어낸다. 모든 일은 우연히 발생하지만 어떤 일을 선택하는 순간 의지가 작동하고 의미가 부여된다. 우연은 필연으로 돌아선다.
내 앞에 나타난 여러 사건 중 적극적으로 선택했던 일이 어느새 삶의 중심이 되었다. 숲 가까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는 삶. 사소하지만 지키고 싶은 취향과 선택이 단단한 즐거움을 선사하며 삶을 어딘가로 나아가게 한다.
돌아보니 자잘한 선택이 삶을 만들어가는 것 같다. 작은 흙덩이를 붙여 나가면 언젠가 커다란 조형물이 만들어지듯 당장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자잘한 선택이 연결되어 삶이라는 물결이 된다. 무수한 우연 속에서 각자가 선택한 것이 모여 삶이라는 유일한 무늬를 그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소한 취향과 선택이 내 삶을 일정한 방향으로 밀어내고 있을까.
투명한 유리구슬 속 푸른 숲을 수시로 들여다본다. 이제 그 숲에 나만 있지 않다. 여섯 명의 여자가 만드는 작지만 수런거리는, 사소하지만 가슴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수시로 오간다.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커다랗게 안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우리가 쓰는 글도 이토록 푸르러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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