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반도체법 1년, 218조 투자 몰렸다"…각자 살길 찾는 한·일·EU

이희권 2023. 8. 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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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8월 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 제조업 일자리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기 위한 지원책을 담은 반도체·과학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 법은 미국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투자한 기업들에 보조금을 주는 것이 골자다. UPI=연합뉴스


1660억 달러-. 미국 백악관은 ‘반도체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반도체법)’ 시행 1년을 맞아 9일(현지시간) 전 세계 460여 개 기업으로부터 218조37000억원대 투자 금액을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460여 개 기업서 218조 투자 유치


미 상무부는 이날 “국내·외 기업들이 지원을 받기 위해 460개 이상의 투자 의향서를 제출했다”며 “반도체 제조에서부터 공급망, 연구개발까지 모든 영역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까지 지원금 신청을 검토하던 기업이 200여 곳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인 셈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반도체를 발명했지만 전 세계 반도체의 겨우 10%만 만드는 나라로 전락했었다”면서 “미국을 다시 반도체 제조의 선두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백악관 역시 “미국 50개 주 중 42개 주에서 반도체법과 관련한 프로젝트가 시작된다”며 “반도체 공급망이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CNBC는 이를 두고 “상당수 반도체 사업들이 정부 보조금 지원에 성패가 달렸다”면서 “미국의 반도체 산업은 횡재(windfall)를 기다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반도체법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확대에 총 520억 달러(약 68조원)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다만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은 초과수익의 일부를 공유해야 하며, 중국 내 공장에 최첨단 반도체 설비를 증설할 수 없다는 독소 조항이 논란이 됐다.


반도체법 버튼 누르자…각국 제 살길 찾았다


이 같은 미국의 자화자찬식 평가를 바라보는 각국 정부와 반도체 업계의 속내는 복잡하다. 중국 견제라는 ‘대의’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새로운 질서 속에서 자국과 기업 이익 극대화를 놓고 동상이몽은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당장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도 올해 ‘유럽판 반도체법’을 승인하면서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동원하는 등 제 살길 찾기에 나섰다.
김경진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이를 계기로 전체적인 공급망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글로벌대외협력(GPA·Global Public Affairs) 조직을 강화하는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반도체 공장(팹)이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식되면서 생산라인이 여러 곳으로 쪼개져 칩 생산 비용이 더 비싸졌다. 이는 애플이나 퀄컴, 엔비디아 등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를 쥐고 있는 미국보다는 칩 제조에 특화한 한국과 대만에 큰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TSMC 본사. 블룸버그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대만 TSMC는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 반도체 전략의 핵심인 대(對)중국 견제에 있어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또 다른 한 축인 생산기지 유치에는 선을 긋는 모양새다. TSMC는 총 400억 달러(약 52조원)를 투자해 건설 중인 미국 애리조나 공장 가동 시점을 당초 2024년에서 1년 미뤘다.

이에 대해 현지 숙련 인력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 공장의 높은 생산 비용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TSMC 창업자 모리스 창은 “미국에서 동일한 칩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대만보다 50% 이상 비싸다”면서 “중국 칩 개발을 막으려는 노력은 지지하지만 미국에서 계속 반도체를 생산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대만 TSMC가 일본에 두 번째 반도체 생산 공장 건설을 검토한다. 사진은 TSMC 신공장 예정지인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치군 기쿠요정. 연합뉴스


한편으론 유럽과 일본에 공장을 연달아 늘리며 생산기지 다변화에 나섰다. 8일(현지시간) TSMC는 독일 드레스덴에 ‘유럽 1호’ 공장을 짓기로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일본 구마모토에 건설 중인 공장도 규모를 더 키운다. TSMC의 이 같은 행보에 양국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으로 화답했다. 독일은 공장 투자금 100억 유로(약 14조5000억원) 중 절반을 부담하기로 했고 일본 정부 역시 총투자액의 40%를 지원금으로 내놨다.

그러면서도 5나노미터(㎚·1㎚=10억 분의 1m) 이하 핵심 공정은 여전히 대만에 남겼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SMC가 최근 첨단 공정 가격을 또다시 10% 이상 인상했다”면서 “치솟은 반도체 생산 비용을 미국 팹리스에 전가하는 한편, 각국 정부의 보조금까지 더해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투자 쓸어간 뒤…“모두 만족할 수는 없다”


막대한 투자를 쓸어 담은 미국은 보조금 문턱을 다시 높이는 분위기다. 미 상무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CNBC에 “반도체 지원금을 신청한 모든 기업이 만족하긴 어렵다. 누군가는 실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보다 많은 기업이 보조금을 신청한 가운데 지원금을 쪼개서 지급하는 방안까지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내년 미국 대선까지 반도체 생산 기지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계속될 것”이라면서 “결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최첨단 공정을 어떻게든 계속 손에 쥐고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응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희권 기자 lee.hee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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