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넘어 '각자도사' 한국, 지금 필요한 건 바로

이민희 2023. 8. 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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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 복지국가 청사진 그린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

[이민희 기자]

현대 복지국가를 상징하는 구호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들어본 적 있는지. 이는 영국 사회보장제도 근간을 만든 윌리엄 베버리지가 1942년 제출한 '사회보험 및 관련 서비스'라는 보고서의 부제목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국민최저기본선을 보장하기 위한 포괄적 보건의료 서비스, 완전고용, 아동수당, 사회보험 도입 등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사회보장 원칙은 1,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 사회정책 수립과 사회보장제도 틀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복지국가는 고정불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 위기와 생태 위기가 중첩된 상황속에서 복지국가도 도전에 직면했다. 위기의 정점에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다.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기후위기와 반복되는 재난은 훨씬 더 파괴적이다. 자연과 사회의 공존공생을 위한 즉각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없다면 더 큰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엄중한 사회위험에 대처하고 사회안전망을 두텁게 구축하기 위한 복지국가 재정비가 절실하다.      
 
 코로나19 신규확진자 수가 5주째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8월 1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전날까지 일주일간 일평균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는 4만5천529명으로, 직전 주(3만8천802명) 대비 17% 증가하며. 주간 단위로 5주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내로라하는 사회복지학계 전문가들이 공동집필한 책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에서는 한국 복지국가 재편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은 복지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한국의 산업구조와 정치질서 변화가 함께 이루어지는 '새판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취약한 복지국가 시스템은 그대로였다. 오늘날 시민들이 직면한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지가 부재한 가운데 이뤄낸 성공의 '덫'에 빠져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붕괴하고 있다, 빠르게    
 
▲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 표지 .
ⓒ 헤이북스
 
지표를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한국사회는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합계출산율은 0.78로 세계 최하위를 찍었고, 유엔의 '세계 인구 추이'에 따르면 2050년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령국이 될 전망이다. 출산율은 바닥인데 생산가능인구의 축소와 노인 인구의 증가가 가파른 속도로 진행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 유지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의미다.      

삶의 여건도 점점 더 후퇴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이미 소득, 자산, 교육의 불평등이 대물림되는 격차사회, 신계급사회가 되었다. 물가는 치솟고 실질임금은 축소되고 불안정 노동에 잠식당한 삶에서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게 가능할까.

언론보도에 따르면 매주 1번씩 일어난다는 '간병살인'에는 아직 정확한 통계조차 없고, 구멍 뚫린 사회안전망은 국민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 불특정 다수 대상 칼부림 범죄가 속출하고 개인용 호신장비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상황.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사회가 정말 통제불능한 사회적 재난 상황에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1년, 한국사회는 '각자도생'하다가 '각자도사'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의 원칙은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이 엄중한 위기상황에서 내놓은 복지국가 해법이라는 것이 복지의 '시장화', '산업화'라니 그 무지한 횡포에 아연실색할 뿐이다.    

복지의 시장화, 산업화 정책이 예고하는 것     
 
▲ 사회보장 전략회의 입장하는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5월 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사회보장 전략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 대통령실
 
지난 5월 31일 '사회보장 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사회보장 서비스를 시장화, 산업화하고 경쟁 체제를 도입하겠다"며 현금복지는 줄이고 '약자복지'를 강화하고 서비스를 고도화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복지 돌봄의 당사자들을 '약자'로 지칭하면서 노골적으로 낙인찍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 이 정부의 복지 철학과 인식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들 중 대표적인 '저부담-저복지' 국가이다. 2021년 국회예산정책처에서 발표한 'OECD 주요국의 공공사회복지 지출 현황'에 따르면, 한국은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율(2019년)이 12.2%로 OECD 평균인 20.0%에 훨씬 못 미친다.      

한국의 복지는 공공보다 민간의 공급 비중이 훨씬 높다는 점에서 이미 '시장화'되어 있다. 노인장기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기관의 99.3%는 민간이며, 국공립 비중은 고작 0.7%에 불과하다. 어린이집도 민간 73.7%, 국공립 16.4%로 민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이미 더 시장화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장화되어 있는 마당에, 오히려 취약한 공공성이 큰 문제로 제기되는 마당에 더 무엇을 시장화하겠다는 말인가?      

남은 것은 서비스의 고도화, 규모화이다. 이러한 맥락은 거대자본들이 노인요양산업에 뛰어들거나 뛰어들 준비를 하고 이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인구규모가 가장 큰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의 은퇴 즉, 어느 정도 복지 구매력을 갖춘 사회서비스 수요자의 대거 출현과도 맞물린다.

진짜 걱정스러운 것은 그 다음이다. 시장화,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양극화를 부추긴다. 복지의 구매력을 갖춘 사람들이 시장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구매하게 될 것이다. 복지에도 격차와 계급이 생긴다면 그것을 '복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복지는 사회위험에 대처하고 보편적이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안전망'인데 말이다.

이제, 복지 정치를 말할 시간 

코로나 이후 복지국가의 재편은 세계적 흐름이다. 지속불가능한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 그 핵심에는 '복지'가 있다. 새로운 국가의 비전과 운영 철학을 바탕으로 복지국가를 재구조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대로 된 국가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한 '전환의 시기'이다.    
 
"새로운 복지국가에서는 더는 간병살인이란 비극이 없다. 가족의 돌봄이 삶과 생활의 위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복지국가에서는 대기업 정규직만 보호받는 세상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자신의 권리로 기본적인 복지와 서비스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새로운 복지국가에서는 상속 자산이 없어도 공정한 기회를 갖고 생애 주기에서 다양한 시도를 벌일 수 있다. 실패해도 패자 부활이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복지국가에서는 노후 걱정이 없다. 공적 소득보장체계가 마련돼 기본적인 생활은 보장받기 때문이다." (책 23쪽)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격차가 대물림되는 사회는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돌봄이 시장에서 서비스를 구매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다면,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노동이 천대받고 착취당하는 구조라면, 국가시스템이 돌봄의 차별과 배제 문제를 평등하고 정의로운 관점에서 다루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민주국가도 복지국가도 아니다. 극소수만 행복하고 대다수는 고통받는 '압정형 사회'로 가지 않기 위해 새로운 복지국가의 구축은 미룰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골적인 복지의 축소와 양극화, 사회안전망의 붕괴를 부추기는 윤석열 정부의 파행을 넘어서야 한다. 다시, 정치의 시간이다. 대한민국 복지국가의 오늘에 대해 냉정히 따져 물을 질문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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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스토리 (https://brunch.co.kr/@1d1980a997f848e/5)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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