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르포]싱가포르 새 시대 정치 실험‥인도계 대통령 뽑을까

2023. 8. 10.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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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국가, 스마트한 정치·경제 체제로 1인당 GDP 9만달러 도전
중국계 주도 속 소수민족 경제력 뒤져 갈등
인도계 경제 전문가 차기 대통령으로 급부상
아내도 일본계‥인종 한계 넘을까

동남아의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기세가 대단하다. 최근 세계 경제를 폭격한 코로나19와 미·중 갈등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겉으로 드러난 싱가포르의 경제지표는 매년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1인당 국내총생산(GDP)으로 따져보면 부존자원이 전혀 없는 싱가포르가 아랍의 산유국을 물리치고 아시아 1위로 올라섰다. 2022년 싱가포르의 1인당 명목 GDP는 무려 8만달러를 돌파했고 올해는 9만 달러에 도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인도계인 타르만 샨무가라트남은 싱가포르의 '경제 차르'로 불린다. 그가 세계 식량기구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사진=세계식량기구홈페이지

2000년대엔 한국과 불과 1만 달러 정도의 격차에 불과했지만, 내년부터는 세 배(6만 달러) 차이로 비교하기 민망해졌다. 이를 놓고 "홍콩에서 탈출한 다국적 기업과 중국 부자들의 ‘묻지마 투자’ 덕분"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싱가포르 정치경제 체제가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에서 가장 스마트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석유를 비롯한 각종 원자재 상품 시장에서부터 그랩(Grab)과 틱톡(Tiktok) 등 세계적 첨단기업까지 싱가포르를 홈그라운드 삼아 세계무대에서 활약 중이다. 테마섹과 싱가포르투자청(GIC) 등 1300조원의 국부펀드가 매년 벌어들이는 자본수익도 천문학적. 자연스레 집값과 임대료가 폭등하고 물가도 덩달아 올랐지만, 주민들의 소득도 크게 늘었기 때문인지 별다른 불만은 없어 보인다.

△여성 대통령 임기 만료=현재 싱가포르의 지도체제는 대통령 할리마 야콥(68)과 총리인 리셴룽(71) 그리고 부총리인 로런스 웡(51)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권은 국부(國父) 리콴유의 아들인 리셴룽 총리가 쥐고 있는데, 이미 고령으로 조만간 정계 은퇴를 약속했기 때문에 인민행동당(PAP)의 차세대 기수인 웡 부총리에 시선이 쏠리는 중이다. 물론 리 총리의 영향력은 막후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에 앞서 해결해야 할 숙제가 한 가지 더 있다. 권력의 한 축을 이루는 6년 임기의 대통령 교체다. 2017년에 취임한 할리마 야콥 대통령의 임기는 오는 9월 13일에 끝이 난다. 아무리 총리가 실권을 쥔 의원내각제라 해도 대통령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리 총리의 은퇴와 50대 총리의 등극이 머지않았기 때문에 인종, 계층과 세대 갈등을 봉합해야 할 차기 대통령의 상징성과 무게감이 커졌다. 하지만 지난 싱가포르 대통령 선거의 우여곡절을 살펴보면 싱가포르가 안고 있는 ‘정치 과제’는 만만치 않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할리마는 말레이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2017년 조금은 조용하게 나라의 대표 얼굴로 등극했는데, 그 이유는 선거 없이 무투표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의외로 대통령직만큼은 직선제로 뽑아왔는데, 1965년 건국 이후 인민행동당(PAP)이 압도적인 권력을 지녔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만 지닌 대통령만은 민의에 양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통령은 당적을 갖지 않는 중립 인사여야 한다는 헌법 조항도 대통령 직선제 유지에 영향을 끼쳤다.

△야당의 급성장=2011년 대통령 선거부터 뚜렷한 변화의 기운이 감지됐다. 당시 대통령으로 당선된 토니 탄(Tony Tan)은 여당의 압도적인 지원에도 2위와의 고작 7,000여 표(0.32%)로 간신히 승리하는 아찔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당시 2위를 기록한 탄쳉복(Tan Cheng Bock)은 같은 여당 출신이라지만 ‘리콴유-리셴룽 부자’와는 다른 노선을 걸은 인물로 기존 체제에 균열을 낼 가능성이 컸다. 리콴유의 서거 이후 치러진 2015년 총선거에서 야당이 득표율을 40% 가까이 끌어올리며 여당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당시 주민들이 가진 불만은 권력 세습이라기보다는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양극화된 경제 구조에 있었다.

싱가포르는 압도적인 개방경제를 활용해 ‘국가의 부(富)’를 증대시키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 욕심 많은 사회다. 이를 위해선 나라의 최고 엘리트를 공무원으로 키워 이들에게 국부의 운용을 맡겨야 한다고 믿는다. 자연스레 공무원들의 보수도 전 세계 1위를 기록 중인데, 40대 장·차관의 연봉이 10억 원대, 총리급은 20억 원을 훌쩍 넘는다. 공무원 보수를 산정할 때는 연관 최상위 산업 최고경영자 보수에 맞먹는 보상 체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50대 이후의 엘리트 공무원은 국부펀드가 투자한 기업으로 건너가 총리급 이상의 보수를 받는 경영자로 활약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평범한 싱가포르 시민들의 고충은 커졌다. 급증한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으로 직업안정도가 흔들리고 자산을 소유하지 못하면 국가성장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피로감이 쌓였다. 특히 부동산 가격이 폭발적으로 급등하자 평범한 노동자의 권익을 강조하는 야당에 대한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위기감을 느낀 PAP는 국민 통합을 빌미로 2017년 헌법을 개정해 아예 차기 대통령 선거는 "말레이계를 뽑겠다"라고 공언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무력화하고 나선다.

△준비된 인도계 대통령 후보=양극화 경제는 동남아의 뿌리 깊은 인종 갈등과도 연관이 깊다. 싱가포르는 75%의 중국계 화인, 14%의 말레이계, 그리고 9% 정도의 인도계로 구성된 나라다. 중국계가 권력을 잡고 있어서 나머지 소수민족의 경제력은 자연스레 중국계에 크게 뒤처져 왔다. 지난 대선에서 말레이계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들의 불만이 국가통합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 없이 대통령을 낙점했다는 비판에 시달리자 인종 배려 없는 자유 선거로 되돌려버렸다. 당연히 순번을 기다린 인도계의 불만이 튀어나왔다.

PAP도 준비된 계획이 있었다. 마침 너무도 적당한 후보가 여당 내에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2010년대 경제 분야 장관으로 두루 활약했던 타르만 샨무가라트남(Tharman Shanmugaratnam, 66) 전 부총리가 그 주인공이다. 2001년 이후부턴 아예 대중정치인으로 활약해왔는데 한때는 리콴유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인종의 한계로 권력의 중심엔 다가서지 못했을 뿐. 심지어 그의 아내는 일본인 출신이다.

시대와 분위기가 바뀌자 그는 자연스레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상했다. 심지어 영국 총리도 인도계가 되었다. 최근 국부펀드 GIC의 전 투자 책임자였던 응콕송, 기업가 조지 고 등 4명이 더 출사표를 던졌지만, 그에게 대적하기엔 쉽지 않다는 평가다. 타르만은 ‘모두를 위한 존중(Respect for All)’을 자신의 대권 화두로 내세우며 "새로운 시대를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다. 중국계가 대다수인 싱가포르 사회는 인도인 혈통에 일본인 아내를 가진 정치인을 압도적으로 선출할 수 있을까? 다음 달 13일 그 정치실험의 결과가 공개된다.

정호재 고려대 아세안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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