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수되지 못한 '암살'... 광복절에 꼭 봐야 하는 영화
[안치용 기자]
▲ 영화 암살 ⓒ 안치용 |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광복절이나 3.1절이면 대중매체에서 항일운동이나 친일파를 다룬 영화가 소개되곤 한다. 2015년 7월 광복 70주년에 맞춰 개봉한 영화 <암살>은, 그해 이후 광복절에 보아야 할 영화 목록 최상단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김구가 지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친일파 암살 작전을 소재로 했다. 1932년 3월에 실제로 있었던,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암살 작전이 모티브였으나, 많은 내용이 상상으로 채워졌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상상을 덧붙인 이른바 팩션(fact+fiction)으로 분류될 수 있다.
▲ 암살 |
ⓒ ㈜쇼박스 |
<암살>은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 1270만 명이나 봤다. 전작인 <도둑들>(2012년)에서도 비슷한 숫자의 관객을 동원해 최동훈 감독은 천만영화 두 편의 연출자로 기록됐다. 흥행의 관점에서 <암살>이 최 감독의 최전성기인 셈이다. 물론 그때보다 고점이 더 높은 제2의 전성기가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순수 오락물인 <도둑들>과 역사물인 <암살>이 아주 달랐을까. 여러 가지 영화 분류법에서 예컨대 액션 등 두 영화는 겹친다. 둘 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사 족보에 올랐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확실한 상업영화임을 알 수 있다. <암살>에는 팩션이란 분류보다는 상업영화라는 규정이 더 본질적이다. 연출자가 같으니 두 영화에 비슷한 영화문법이 작동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고,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사성은 중요하지 않다. <암살>이 역사물을 표방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과장하면 <도둑들>과 <암살>보다, <암살>과 <전함 포템킨>의 친연성이 더 크다. 표현보다 의도를 중시해야 하는 영화가 있는데, <암살>이 그렇다.
개봉 당시 <암살>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이 좋지는 않았다. 소위 전문가들과 달리 대중은 영화에 우호적이었다. 우호적이란 말은, 관객이 많이 보았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는 직관적 이해와는 다른 맥락을 갖는다. 영화를 평가하며 전문가들이 표현에 치중했다면, 관객은 의도에 집중했다.
이 논의에서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암살>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극영화이다. 1932년 3월에 실제로 있었던,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 작전을 모티브로 하였지만, 영화와 달리 현실에선 작전이 실패했다.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 속사포(조진웅), 황덕삼(최덕문)은 김원봉(조승우)의 제안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염석진(이정재)의 주도로 매국노 강인국(이경영)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일본 육군 소장 카와구치 마모루를 암살하는 작전을 전개하고 성공한다.
▲ 암살 |
ⓒ ㈜쇼박스 |
<암살>은 다른 접근법을 택한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작전'이 영화의 본류가 아닐 수 있다. 등장인물부터 살펴보면 김구, 김원봉은 실재한 인물이고 극에서도 그 이름으로 나온다. 암살대 3인은 실재한 인물에 가깝다. 속사포엔 실존 모델이 있는 듯하고, 저격수인 안옥윤의 이름은 안중근, 윤봉길, 김상옥 세 의사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하니 독립군 전체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안옥윤과 함께 줄거리의 두 축을 이루는 염석진은 실존 인물이 있다고 할 수도 있고 당시 친일파를 종합했다고 할 수도 있다. 암살 대상인 강인국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은 실제 인물이 아니다.
이름을 기준으로 확인된 '사실'은 실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자 <암살>의 후경을 이루는 김구, 김원봉이란 걸출한 독립운동 지도자이다.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대사로는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안옥윤)에 해당하는 독립투사들은 실존 인물로 특정되지 않았으나, 가공의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안옥윤은 대표적인 독립투사 세 명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면서 동시에 여성 독립군으로 유명한 남자현 의사를 모델로 했다고 하나, 극에서 밝혀지지 않고 후문으로 전한다. 친일파를 대표하는 염석진도 마찬가지다.
안옥윤과 염석진이 실존 인물로 특정되지 않으나 관객은 극중 독립투사와 친일파에서 '실존' 느낌을 강하게 받을 법하다. 사실상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의 활용으로 보편성의 획득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관점에 따라 캐릭터의 설득력이 약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史實)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면서 전형성을 강화하면 공통의 역사를 보유한 관객들에게는 더 큰 설득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영화가 제시하는 대립 구도는 친일파와 독립군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이 영화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친일파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진다. 영화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친일파는 독립군과 직접 부대끼는 현장의 친일파이다. 화려한 액션 끝에 강인국을 처단한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지만 부수적이다. 암살대상보다는 암살을 막으려는 일제의 말단 하수인이 더 비중 있게 그려진다. 상응하여 독립군의 암살 작전 완수나 작전 중 산화 또한 핵심이 아니다. 영화는 우리 민족 내부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반일이나 국뽕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역사에 다가가려고 했다고 봐야 한다.
▲ 암살 |
ⓒ ㈜쇼박스 |
영화는 1933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앞과 뒤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한다. 그 세 번의 시기에서 세 번의 암살이 일어난다. 전사(前事)에서는 염석진이 적의 수괴를 암살하려는 독립군이고, 1933년의 본 이야기에서는 밀정으로 변한 염석진이 안옥윤 등 독립군의 암살 작전으로부터 친일파 수괴와 일본군 장성을 지키려고 애쓰나 실패하고, 후사(後事)에서는 일제에서 경찰로 일하다가 해방 후 우익으로 변신해 살아남은 염석진이 반민특위 재판을 받고도 풀려나는 모습과 마지막에 재판정 밖에서 암살당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세 시기에 두루 극을 이끌어가며 역사성을 구현하는 인물은 염석진이다.
안옥윤도 세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아기였을 때 염석진과 조우한 안옥윤은 1933년 암살 작전중에 또 해방 후에 그를 다시 만난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다룬 세 번의 암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암살을 상상한 것이다. 첫 번째 암살이 실패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암살은 성공한다. 세 암살 사건 중에서 역사에 부합한 사례는 실패한 첫 번째 암살이다. 이 실패는 독립군 염석진을 일제의 개로 만든다. 우리 현대사에서 보듯, 해방 후에도 염석진 유의 인간이 살아남아 승승장구한다. 안옥윤에 의한 처단 같은 사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많은 친일파가 대한민국에 기민하게 또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국가 주도 세력의 일원이 된다.
▲ 암살 포스터 |
ⓒ ㈜쇼박스 |
대미를 장식한 안옥윤과 염석진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암살은 일종의 해원이며 동시에 역사의식 같은 걸 제시한다. 염석진에게 약간의 동정을 느끼게 되는 건, 그가 처단됐기 때문일 것이고, 현실 역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스크린 밖의 친일파에게 동정심을 느낄 이유는 없겠다. 안옥윤이 묻는다. "왜 동지를 팔았나?" 염석진이 대답한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안옥윤이 염석진을 척살하기 전에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암살'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고 임무가 완수되지 못했다. 영화 <암살>이 상업영화이자 역사물로서 갖는 의의는 이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혹은 역사와 관련하여 종종 인용되는 경구인 '前事不忘 後事之師(전사불망 후사지사)'를 영화 <암살>이 극화하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영화는 모종의 우회를 통해 역사를 냉정하게 대면하게 해준다. 대면할 마음이 아예 없으면 끝내 대면하지 못하겠지만.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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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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