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女파일럿 조은정 “늦은 꿈은 없어…마음이 시키면 해봐야”
오산 미군 공군부대 훈련, 델타 항공 비행교육원 교육 등 거쳐
온갖 편견과 오해에 시달려…중국 첫 한국 여성 파일럿 기록
“모든 일에 때가 있지만, 그건 최적기일 뿐이다. 조금 늦었어도 못 할 건 없다.”
책 ‘우리는 모두 장거리 비행 중이야!’(자음과모음)를 펴낸 조은정 파일럿의 말이다. 그가 파일럿으로 첫 조종간을 잡은 나이는 서른다섯. 20대 중후반 무렵 비행에 나서는 업계 평균치와 비교했을 때 그의 시작은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았고, 역경에 굴하지 않았다. ‘최적기’를 기준으로 한 주변의 만류와 우려에도 악착같이 도전했고 끝내 길을 찾아냈다. 20여년 전 그를 고군분투하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모든 것이 선배들의 응원 덕분이라고 말한다. “넌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다. 너 하기에 달렸다”고 했던 선배들의 격려….
그는 어려서부터 뭐든 스스로 결정하고 길을 찾는 아이였다. 6남매 중 막내 늦둥이로 태어나 외동딸처럼 자랐다. 바로 위 오빠와 9살 차이가 나 그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언니, 오빠들은 모두 사회에 나가거나, 자기 가정을 꾸려 생계를 꾸리기에 바빴다. 응석받이로 귀염받고 크지 못했다. 그가 어릴 적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공백이 컸지만, 엄한 아버지는 그의 필요에 둔감했다. 요리와 집안일 등 생활 전반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도 그런 경험은 이후 험난한 과정을 거쳐 파일럿이 되는 데 귀중한 밑천이 됐다.
그가 처음으로 파일럿의 꿈을 마음에 품은 건 29살, 호텔에 근무했을 시절이다. 호텔 안내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차에 여성 기장이 두 남성 부기장을 거느리고 들어오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여성 부기장을 간혹 보긴 했지만, 여성 기장이 남성 부기장을 이끌고 당당히 앞서 걷는 모습은 그의 눈과 가슴을 매료시켰다. 그는 당시 상황을 “여성 파일럿에 관한 편견이 완전히 깨져 버리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한국에선 만류하던 파일럿…외국에선 “WHY NOT?”
그길로 파일럿이 되는 방법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파일럿이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항공대를 나오거나 공군에서 넘어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2000년대 당시 외환위기 직후라 업황도 좋지 않았다. 편견의 문턱도 높았다. 한국인 파일럿 대다수는 그의 ‘나이’ ‘작은 키’ ‘여성’이라는 제약을 강조하며 난색을 표했다. 본인들의 겪었던, 예상되는 문제를 확대해 ‘널 위한 조언’으로 포장해 포기를 권했다.
하지만 외국 파일럿들의 생각은 달랐다. 한결같이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문제 될 것 없다”며 “WHY NOT?(왜 안되겠어?)”을 외쳤다. 격려에 힘을 얻어 길을 모색했다. 항공대를 나온 것도, 공군 출신도 아니었던 그의 눈에 띈 건 오산 공군 기지 내 비행클럽. 주한 미국 대사관에 취직하면 미군기지 출입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대사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대사관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가 원하는 걸 쉽게 얻어낸 행운아인 줄 알지만 수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끝에 2001년 10월 대사 비서직에 합격했다. 이후 3년여 시간을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오산 공군 기지 내 비행클럽에서 자가용 비행기 면허를 취득하고,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 그는 “외국과 달리 국내는 유독 ‘내가 힘들었으니 너도 힘들거야’라고 단정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당시 난 ‘안 되면 말고’의 심정으로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기장이 되기까지 오해·갈등·상처 가득
미국에서 마주한 여성 비행 교관은 엄격했다. 국내보다 사정은 나았으나 당시 미국에도 존재했던 여성을 향한 편견 어린 시선을 이겨내고자 교관은 그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칭찬에 인색했고 실수에 무자비했다. 서러움을 참지 못해 눈물을 터뜨린 어느 날, 여성 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이 해서는 경쟁할 수 없어. 남자보다 더 잘해야 선택받을 수 있는 거야.”
혹독한 훈련을 통과한 후 항공 수요 급증으로 파일럿으로선 ‘기회의 땅’이었던 중국에 입성했지만, 그곳에 뿌리내리는 과정은 가시밭길과 같았다. 중국 최초의 한국 여성 파일럿으로, 중국 항공사에서 기장 시험에 합격했지만, 회사 내 파벌 갈등의 영향으로 정식 임명이 6년간 지연됐다. 한국인 남성 기장의 이른바 ‘새치기 착륙(연료 부족 위험으로 관제탑 허가 없이 착륙)’의 당사자로 오인돼 중국 누리꾼의 거센 여론몰이에 휩쓸리기도 했다. 평생 경험해본 적 없는 비난에 인생 최대 고비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오해가 풀리고, 국내 언론에 ‘해외에서 활약하는 여성 파일럿’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기장(기장 시험에 합격했지만, 임명은 받지 못한 상태였음)으로 소개된 것이 문제가 돼 거짓말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당시 그에겐 자격을 갖췄음에도 회사 내 알력 다툼에 휘말려 이유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2013년 국내 항공사 취업 후 적응 과정도 험난했다. 등용문이 좁아 이미 돈독한 유대 관계를 형성한 파일럿 세계에 편입한 그는 힘겨운 적응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오해와 곡해, 배척과 비난이 난무했다. 이유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번은 중국에서 만난 (시력 요인으로 자격 박탈 위기에 놓인) 한국인 파일럿에게 건넨 호의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한국 항공사에 근무하는 그의 지인을 통한 비방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는 “온라인 비방이 너무 심해 그때부터 인터넷 댓글을 읽지 않는다”며 “비방글을 올린 사람 중 한명이 같은 회사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여성 파일럿을 향한 편견도 해결 과제였다. 기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회항에도 일부 승객은 “여성 기장이어서 그런 거냐”며 의심의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조은정 파일럿은 이런 분위기를 지난 10년 사이 여성 파일럿 수가 크게 늘었음에도 아직도 존재감이 미미한 이유로 설명한다. “2013년만 해도 국내 여성 파일럿 숫자가 20명도 안 됐지만, 이제는 항공사마다 20명씩 있다. 다만 그런 여성 파일럿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건 어쩌면 그들을 향한 편견 때문일지 모른다.”
파일럿은 천직, 도전의 쾌감 놓칠 수 없어
그럼에도 그에게 파일럿은 ‘천직’이다. 그는 “이륙과 착륙의 도전이 선사하는 성취감이 굉장히 크다. 일을 안 해도 될 만큼 돈이 많다고 해도 조종간을 못 놓을 정도”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최근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근무하던 항공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2020년 말부터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데믹으로 상황이 나아지면서 5월부터 업무 복귀가 이뤄지고 있지만, 최종 복귀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될지는 미지수다. 우선 복귀자 명단이 발표됐지만 그의 이름은 포함되지 못했고, 어쩌면 추가 복귀는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특수직이기에 파일럿 경력을 살려서는 다른 분야로 전직도 어려운 상황. 최근 꽃 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그는 “제 인생에 굉장히 많은 좌절이 있었지만 그걸 담아두는 성격은 아니다. 어찌 내 맘대로만 되겠냐”며 “좌절되긴 하지만 우울해한다고 바뀔 건 없기에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의지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다시 한번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조은정 파일럿은 보잉 737 여객기 기장으로 조종간을 잡았다. 일본 신용카드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해 서울 힐튼 호텔에서 호텔리어로 일했다. 호텔에서 우연히 외국인 여성 파일럿을 본 후 파일럿의 꿈을 키웠고 끝내 이뤘다. 파일럿이 되기 위해 세 번의 도전 끝에 미국 대사관에 입사, 대사관저 비서로 일하며 오산 미군 공군부대에서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델타 항공 비행교육원에서 전문 파일럿 교육을 받은 후, 중국 베이징 팬암 항공 학교의 교관을 거쳐 중국 상하이 지샹 항공의 파일럿으로 입사했다. 에어버스 320 부기장을 거쳐 이스타항공의 기장이 됐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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