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한국와인, 소비자의 평가는?
[와인컨슈머리포트 4.0]
“부족한 곡물 대신 과일로 술을 만들 방법을 찾아보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와인은 시작됐다. 당시 국내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과일 중에서도 ‘포도’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척박한 땅에서도 포도는 잘 자랐기 때문이다.
포도로 만든 한국 최초의 와인은 1974년 출시된 해태주조의 ‘노블와인’이다. 1977년에는 동양맥주의 ‘마주앙’이 나왔다. 로마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지금도 미사주로 쓰이는 와인이다. 이어 ‘두리랑(금복주, 1984년)’ ‘샤토 몽블르(진로, 1985년)’ ‘그랑주아(대선주조, 1987년) 등이 나오며 1980년대 한국와인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88올림픽을 앞둔 1987년에 수입자유화가 시행되며 해외 와인이 수입됐고 한국와인은 어느새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004년에는 한·칠레 FTA가 체결됐다. 식용포도가 싼값에 들어오자 국내 포도 농가들은 자구책으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선 1993년에 지역특산주 면허가 생기면서, 과일을 재배하는 농가에서도 술을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와이너리형 농가의 토대가 만들어진 계기다. 하지만 와인 양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포도를 재배하는 기후부터 달랐다.
양조용 포도는 일조량이 풍부하면서 여름이 건기이고 겨울이 우기인 지역에서 주로 잘 자라는데, 한국의 기후는 완전히 반대였다. 일조량이 부족하면 단맛도 떨어진다. 양조용 포도는 식용포도보다 알이 작고 씨가 크며 껍질은 두껍지만, 당도와 산도는 더 높다. 당은 알코올로 변하는데, 당이 많아야 알코올 발효도 잘된다. 포도 껍질과 씨, 줄기도 중요하다. 와인 특유의 색과 텁텁한 맛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도약하는 한국와인
판이 바뀐 건 ‘청수’가 등장하면서다. 청수는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시벨 9110’과 ‘힘로드’라는 품종을 교배해 개발한 품종이다. 20년의 육종 기간을 거쳐 1993년 선발됐다. 청수는 식용으로 개발했지만, 양조용으로 가능성이 더 컸다. 2006년 농촌진흥청 주도로 시험양조를 진행하면서 식용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기술연구가 시작됐다. 이때부터 한국에서 재배하기 적합한 포도품종과 양조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한국와인의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최근 한국와인이 해외 품평회에서 잇달아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특징은 식용포도의 한계를 양조기술로 극복했다는 데 있다. 품종도 늘어났다. 국내 약 20여 곳의 와이너리에서 재배하고 있는 청수는 물론이고 산머루, 샤인머스켓, 킹데라 등 다양한 품종을 써서 맛과 향이 다양해지고 품질도 개선됐다.
산머루로 와인을 만드는 곳은 경북 김천의 수도산 와이너리다. 산머루로 만든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2018’는 2022년 베를린와인트로피에서 골드를 수상했다. 풍미가 진한 킹데라 품종을 사용한 갈기산포도농원의 ‘포엠 로제’와 청수와 나아이가라 품종을 블렌딩한 ‘포엠 화이트’는 2021년 아시아와인트로피에서 골드를 받았다. 충북 영동 불휘농장에서 만든 ‘시나브로 청수 화이트’ 역시 청수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2021년 베를린와인트로피 은상을 수상했다.
출품한 와인 24종이 모두 메달 획득
와인컨슈머리포트에서 평가한 한국와인은 총 25종이다. 국내 약 250개 와이너리 중에서 와인품평회 수상경력이 있는 10곳에서 화이트와인 12종과 로제와인 4종, 레드와인 8종을 출품했다. 합치면 총 24종인데, 나머지 1종은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만든 와인이다. 품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공정한 경쟁을 위해 최종 평가 발표에는 제외했다. 평가단은 전문가 16명과 소비자이면서 와인애호가 평가단 60명으로 총 76명이 참여했다. 애호가 평가단의 주요 연령대는 20~30대다. 와인을 마신 경험도 10년 미만인 사람들이 많았다. 성별은 남성 16명, 여성 36명으로 여성의 비중이 높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24종 전체가 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랑골드 메달을 받은 와인은 없었다. 전문가 평가단은 15개에 골드를, 애호가 평가단은 단 3개에 골드를 주는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전문가와 애호가 모두에게 높은 점수로 골드를 받은 와인은 금용농산의 ‘미르아토 샤인머스켓 화이트 스파클링’이다. 샤인머스켓은 단단하고 당도가 높아 식용으로도 큰 인기를 얻는 포도품종이다. 화이트 스파클링와인을 드라이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등은 수도산와이너리의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레드’와 갈기산포도농원의 ‘포엠 로제 세미 스위트’가 차지했다. 그중에 유기농 산머루로 만든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레드’는 전문가 평가에서 1점 차이로 그랑골드를 받지 못하고 골드를 받았으며, 애호가 평가에서는 실버를 받았다. 와인연구소 최정욱 대표는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레드에서는 상대적으로 숙성한 와인(실제로는 3년 이상 숙성했다)에서 나는 풍부한 향이 있었고, 적당히 감미롭고 부드러운 맛의 조화가 잘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함께 2등을 차지한 갈기산포도농원의 ‘포엠 로제 세미 스위트’는 유독 남성 평가단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포엠 로제 세미 스위트’는 킹델라웨어라는 식용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영롱하고 진한 루비색이 특징인데, 양조용 포도로 만든 와인에서는 볼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김소희 소믈리에는 “식용포도에서는 드물게 느껴지는 장미 향이 풍겨서 달콤한 장미를 마시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대향와이너리의 ‘대향와인 화이트 세미 스위트’는 3등을 차지했다. 청수 품종으로 만들었으며 오크통 없이 저온 숙성으로 만든 와인이다. 소펙사에서 실시하는 와인대회에서 아마추어 부문 1위로 어드바이저상을 수상한 김성실 와인전문가는 “잘 익은 청포도 향과 풀 향이 먼저 나고, 그 뒤로 파인애플, 망고 같은 열대과일의 향이 어우러져서 전반적인 조화가 좋다”면서 높은 점수를 줬다. 또 성별 구분 없이 높은 점수가 고르게 나온 와인이기도 하다. 세대별로는 20대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와인 경험별로 세대별로 다른 와인 평가
와인 경험을 기준으로 본 평가는 상이했다. 경험이 1년 이하인 사람들은 ‘대향와인 화이트 세미 스위트’를 1위(92점)로 꼽았다. 이어서 ‘미르아토 샤인머스켓 화이트 스파클링’이 91점으로 2위를 했고, ‘위 드라이 레드 와인’, ‘미르아토 샤인머스켓 스위트’, ‘샤토 미소 스위트 로제’,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레드’가 90점으로 3위를 했다.
와인 경험이 1~3년 차인 사람들은 무려 14개 와인에 골드 메달을 줬다. 93점의 높은 점수로 1위를 차지한 건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레드’와 ‘포엠 로제 세미 스위트’다. 반면 3~5년 정도의 와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5개 와인에 골드를 줬다. 가장 점수가 높은 것은 모동21와이너리의 ‘유총 와인 드라이’다. 93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경험이 제일 많은 5~10년 차는 단 2개의 와인에만 골드 메달을 줬다. ‘미르아토 샤인머스켓 스파클링’과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레드’다.
연령대로 살펴보면, 20대가 가장 좋아한 와인은 91점을 준 ‘미르아토 샤인머스켓 스파클링’, ‘대향 스위트 화이트와인’, ‘포엠 로제 세미 스위트’의 3종이다. 이어 30대가 가장 좋아한 와인은 92점의 ‘크라테 미디엄 드라이 레드’와 91점을 얻은 ‘위 레드 드라이’, ‘샤토 미소 스위트 로제’다. 40대가 골드 메달로 선택한 와인은 91점을 획득한 ‘대향와인 화이트 세미 스위트’ 1종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전 연령층에서 골고루 골드를 받은 와인은 없었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와인 경험이 낮은 20~30대가 높은 점수를 준 반면에, 40대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낮은 점수를 줬다. 와인컨슈머리포트를 공동주관하는 와인소풍의 이철형 대표는 “수입 와인을 마셔본 경험이 주는 맛과 향에 관한 연령대별 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대표는 “이번 품평회를 통해 식용포도로 만든 한국와인의 고급스러운 향미를 전문가와 소비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서 "한국와인이 월드 클래스로 성장할 가능성과 국내외 와인시장에서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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