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모든 책임은 여기에서 멈춘다
바이든 대통령은 방한 시 윤석열 대통령에게 트루먼 대통령의 명언이 새겨진 팻말을 선물했다고 한다. ‘모든 책임은 여기에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 듣자 하니 ‘대통령직이란 더 이상 남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는 최종적인 자리’라는 뜻이란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국제행사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나라가 됐을까? ‘한류’로 쌓아 올린 국가의 이미지가 잼버리 대회 하나로 우르르 무너져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대통령실은 전 정권 탓부터 했다. “전 정부에서 5년 동안 준비한 것이다.” 수해도 전 정권 탓, 아파트 부실 공사도 전 정권 탓, 초등교사 죽음도 전 정권 탓, 하다못해 대만발 괴소포까지도 전 정권 탓, 모든 게 전 정권 탓이다. 정권 교체된 지 이미 1년 3개월이 지났건만 국민을 보호할 책임은 여전히 문재인 정권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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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잼버리 책임 놓고 꼴사나운 공방
언제까지 ‘전 정권 탓’ 돌릴 건가
여야 다 같이 책임 면하기 어려워
희생양 찾기보다 해결책 제시를
」
윤 대통령은 언젠가 “국민의 안전에 무한책임을 진다”고 말했다. 근데 무한책임을 진다는 그 대통령을 현직이 아니라 전직으로 이해하는 모양이다. 매사 이럴 바엔 선물로 받은 그 팻말에서 ‘여기’(here)를 ‘저기’(there)로 바꾸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어떤 매뉴얼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다음은 아마 ‘잼버리 카르텔’ 색출일 것이다. 이 정권은 매 사안에서 어떤 ‘나쁜 놈’을 지목해 모든 책임을 그리로 떠넘기곤 한다. 그다음 순서는 빤하다. 검찰 수사, 아니면 감사원 감사, 아니면 국세청 세무조사 아니겠는가.
친 이준석계 정치인들은 이번 사태를 아예 여가부 폐지의 호기로 보는 모양이다. ‘여가부 폐지’는 윤석열 캠프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다. 김현숙 장관이 여가부를 사실상 폐지하는 자해의 사명을 띠고 그 자리에 임명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민주당의 이원택 의원은 이미 작년 8월에 정부의 여가부 폐지 움직임이 잼버리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차질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10개월 앞둔 잼버리가 내년 8월이다. 과연 주무 부처가 사라진 상황에서 잼버리가 제대로 될까요?”
강태창 전북도의원 역시 같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여가부는 관련 주체들 간 긴밀한 소통을 통해 잼버리대회를 준비 중이라지만, 윤석열 정부는 여가부를 폐지하겠다고 밝혀 대회 준비를 위한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운영되는지 의문이다.”
이 경고대로 주무부처인 여가부는 조직위 안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 결과 대회는 파행을 겪었다. 그런데 정작 여가부 위상을 떨어뜨려 놓은 당사자들이 외려 여가부 폐지를 외친다. 정작 폐해야 할 것은 자기들 입이 아닌가?
이것이 파행의 ‘원인’이라면, 파행의 ‘조건’은 따로 있다. 애초에 새만금을 야영지로 택한 것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입지 선택의 기준이 ‘대회의 성공적 개최’가 아니라 ‘새만금의 지속적 개발’에 적합한 곳이었다는 얘기다.
새만금의 부안 쪽 해창갯벌은 잼버리를 빌미로 이번에 새로 조성한 곳. 8월 날씨라야 폭염 아니면 폭우인데, 나무도 못 심고 물도 안 빠지는 곳에서 야영을 하라니 탈이 날 수밖에. 결국 애먼 젊은이들이 신공항 사업을 위해 바치는 희생양 제물이 된 셈이다.
파행의 책임을 서로 상대에게 돌리나 여야 모두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재인 정부와 전라북도는 그릇된 결정을 바로잡지 않았고, 윤석열 정권은 예상되는 문제, 반복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후견주의(clientelism)에 관한 한 민주당 책임이 크다. 민주노총 전북지부에서 이례적으로 민주당을 비난하고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전북도, 민주당 정치인은 새만금 잼버리 행사를 빌미 삼아 새만금 신공항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했다.”
이번엔 지역이 호남이라서 그렇지, 사실 ‘예타 면제’로 표현되는 각종 후견주의 관습에선 과연 영남이라고 자유로울까? 아마도 국민의힘에는 그 지역 버전의 후견주의가 있을 것이다. 이참에 엑스포 유치나 가덕도 신공항 사업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대회가 파행으로 끝났으니 한동안은 사정 정국이 도래할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 이상, 사업 전반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 홀로 정의로운 대통령께서 아랫사람들에게 호통치는 ‘사돈 남 말하기’ 쇼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적어도 지난 정권에선 평창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청와대에서 자체 TF를 꾸렸다. 그런데 이번 정권에선 대통령실이 대회가 파행을 겪은 후에야 수습에 나섰다. 그사이에 한 일이라곤 전 정권 탓뿐. 국민은 무능은 몰라도 무책임은 용서 안 한다.
총체적 부실이 드러났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을 찾거나, 정적을 공격하는 소재를 찾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의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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