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실학산책] 2000년 전 임연 “충신은 사정에 매이지 않아”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생각은 일반 사람과 확실히 달랐다. 지금부터 200년 전 전제군주국가에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이 그대로 따랐던 논리, 즉 상관의 명령에 아랫사람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다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목민심서』의 ‘예제(禮際)’ 조항과 ‘수법(守法)’ 조항을 제대로 검토해 보면 다산의 생각이 얼마나 선진적·합리적이었는지를 바로 알게 된다. 백성과 나라가 제 길을 갈 수 있으려면 ‘상명하복’ 논리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다산처럼 명쾌하게 정리해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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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잘못된 지시 바로잡아
다산이 『목민심서』에서 강조
상명하복 논리에 담긴 위험성
상관에 직간하는 용기 필요해
」
‘예제’ 조항의 이야기다. 중국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 광무제(光武帝)는 뛰어난 황제 중의 한 사람인데, 그의 유능한 신하 임연(任延)을 무위(武威)라는 고을의 태수(太守)로 임명했다. 임지로 떠나는 임연에게 황제가 훈시했다. “상관을 잘 섬기어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
그러자 임연이 대답했다. “신이 듣자옵건대 충신은 사정(私情)에 매이지 아니하고, 사정에 매이는 사람은 불충하다 했습니다. 바른 것을 이행하고 공(公)을 받드는 것이 신하의 도리요, 상관과 부하가 한통속이 되는 것은 폐하의 복이 아니오니, 상관을 잘 섬기라는 말씀을 신은 감히 말씀대로 받들 수 없습니다.” “그래 경의 말이 옳소.”
상관을 잘 섬기라는 말이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니건만, 지엄한 폐하 앞에서 감히 말씀대로 따를 수 없노라고 답변할 수 있는 신하, 황제의 잘못된 생각을 바르게 고치도록 간(諫)할 수 있는 신하가 많을 때만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질 수 있음을 강조하려고 다산은 그런 일화를 소개했다.
공직자란 ‘이정봉공(履正奉公)’, 올바른 일을 이행하고 공을 받드는 것이 중요하지 잘못된 상관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세상에서 상관만 잘 섬기는 일은 국가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그런 정신이 임연에게는 있었다. 2000년 전에 직간하는 신하가 있었고 그런 직간을 바로 수용하는 황제가 있었으니 그 얼마나 위대한 황제와 신하인가. ‘예제’는 공직자들의 상하, 동료, 윗분과 아랫사람 사이에 예의 바르게 교제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수법’ 조항을 보자.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들은 상명하복 관계로 하관은 상관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만 예의 바른 처사로 생각하기 쉬운데, 다산은 분명히 말했다. 상관의 명령에 따르고 상관을 잘 섬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이(利)에 유혹되어서도 안 되고, 위세에 굽혀서도 안 되는 것이 목민관의 도리이다. 상사가 독촉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몸보신과 지위 유지만을 위한 처사는 이(利)에 유혹된 일이자 굴종일 뿐이지 하관이 해야 할 정당한 공무는 아니다.
‘예제’의 다른 곳을 보자. “상사의 명령하는 것이 공법(公法)에 어긋나고 민생(民生)에 해를 끼치는 것이면 마땅히 의연하게 굽히지 말고 확연히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상명하복이라는 원칙 때문에 상사의 명령대로, 상사가 따르라는 법대로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이유를 다산은 훌륭하게 설명하였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자. 공법에 위배되고 민생에 해를 끼치는 명령을 내린 통치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거기에 따르지 않거나 복종하지 않으면서 상관이 바르게 갈 수 있도록 간(諫)해준 하관이 과연 있기나 했었던가. 벼슬자리 떨굴까 보아 입 꼭 다물고 시키는 대로 따른 하관이 얼마나 많았던가. 또 부당한 명령, 공법이나 민생에 해로운 법령이나 지시, 거기에 항거하며 자신을 지켰던 하관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자유당·군부 등의 독재 정치에서 온 국민이 고난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것은 오로지 임연과 같은 직신(直臣)이 없었고, 아부와 굴종만 일삼으며 부귀영화만 누리려던 하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2000년 전의 후한 시대, 200년 전의 다산 시대, 그런 엄혹한 전제군주 시대에도 상명하복만이 옳은 공직윤리와 예제가 아니라고 했던 위대한 지혜는 21세기의 선진국인 한국에서도 제대로 이어나가야 할 필수 덕목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상은 그것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잘못된 명령이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상관을 바르게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에 없는 전문가라고 추켜세우며 부당함을 은폐하려는 경우가 있다. 민의를 최대한 수용해야 할 민주주의의 위기마저 감지된다. 그 어느 때보다 자유와 공정, 그리고 상식이 중요한 시대라는데, 올바르게 간한다고 누가 그렇게 큰 벌을 받을 것인가. 하관들의 기개를 보고 싶다. 상관 또한 부당한 명령을 내리지 않도록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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