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의 사람사진] ‘길 위의 사진가’ 김진석

권혁재 2023. 8. 10.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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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얼굴에 빠지다
"홍범도 장군도 보여요"

권혁재의 사람사진/ 사진가 김진석

『고려인, 카레이츠』(큐리어스,2021)라는 사진집을 폈다.
거기엔 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 등 11개국의 고려인이 있다.
김진석 사진가가 2019년 2월부터 2020년 3월까지
14개월간 고려인의 이주 길을 따라가며 찍은 고려인의 얼굴이다.
책에서 김진석 사진가는 단호히 말한다. ”여기, 우리의 얼굴이 있다.”

1920년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간도 은행에서 현금 15만원(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50억 정도) 탈취한 독립운동가 최봉솔(묘지명, 당시 최계립으로 활동) 선생의 넷째인 최 알렉산드라(왼쪽에서 두 번째) 여사의 가족들. 최 여사와 가족들은 현재 카자흐스탄 쉼켄트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늘 길을 따르는 그를 두고 사진계에선 ‘길 위의 사진가’라 부른다.
실제 그는 2008년 제주 올레 공식 사진작가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스페인 카미노, 스위스 몽블랑, 네팔 히말라야 등의 길 위에 늘 있었다.
이렇듯 그가 늘 길 위에 있는 이유는 뭘까.

“길을 가다 보면 사람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고려인도 그렇게 만났고요.”

본인을 신순겸 장군(가계도에 그려진 '신순겸 927'로 추측하자면 신숭겸 장군을 그리 표기한 듯하다)의 37대손이라고 소개한 신 고바르드 씨.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벽에 이렇듯 가계도를 놓고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CIS 고려인 비즈니스 초대 회장을 지냈고 농심, 오뚜기 등과 연계해 제품을 판매하는 상점 5곳을 운영 중이다.

그가 고려인의 길을 따라갈 마음의 씨앗이 맺힌 건 2016년이다.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 요청으로 두 달간 사진을 찍은 데서 비롯됐다.

“거기서 여러 상황을 만났는데 계속 연결점이 고려인으로 귀결되더라고요.
그중 잡초만 무성한 홍범도 장군의 무덤을 보고 비애감이 들었습니다.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싸웠던 장군 또한
1937년 강제로 이주당했으며 여기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더라고요.”

우리가 익히 아는 홍범도 장군 또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이었던 게다.

그는 2017~2018년 2년간 청와대 대통령 전속 사진 담당으로 일했다.
당시 4·27 남북정상회담 기록 사진 또한 그의 몫이었다.
청와대 전속을 그만둔 후, 그는 본격적으로 고려인의 길을 따라나섰다.
있던 돈을 털고, 차를 팔아 마련한 6만 달러를 들고 홀로 나선 게다.
이렇게 시작한 14개월의 여정, 대체 무엇이 그의 발걸음을 잇게 했을까.

동유럽에서 유일한 고려인 민족학교인 '정수리 학교'의 김 루드밀라(66) 교장. 학교는 우크라이나의 하리코프(Kharkov)에 있다. 김진석 사진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그가 만든 책을 들고 학교를 다시 찾기로한 약속을 지기기 위해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 독립군의 항일 무장길을 따르다가
길옆에 스치는 비석을 봤습니다. ‘鎭魂(진혼)’이라고 쓰였더군요.
그게 일본군 위령비였어요. 그 순간 '그럼 우리는?'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독립운동에 대해, 그들의 죽음에 대해 너무 잊고 있는 겁니다.”

권혁재의 사람사진/ 사진가 김진석


2021년 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우리 땅에 돌아와 안장됐다.
그것을 위해 물밑 작업했던 그가 다시금 말한다. “고려인, 우리의 얼굴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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