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설의 출발은 여성주의…상처를 언어로 헤아리게 됐죠
“저는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에요. 마음이 너무 자주 빠개지고 망가지죠. 여성주의를 공부하기 전까지 왜 이런지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여성주의를 알게 되면서 상처를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낼 수 있게 됐고 그게 곧 소설이 됐습니다.”
최은영(39)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사람을 세심하고 깊게 그리고 싶어서 여성주의 관점으로 글을 써왔다. 여성주의와 나를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최근 신작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사진)를 낸 그를 지난 7일 만났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섬세한 시선으로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듬는 작품 세계의 연장선에 있다. 여성 인물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적 사건을 풀어나가는 작법도 여전하다. 표제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젊은 대학 강사와 20대 후반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대학생의 우정을, ‘일 년’은 동갑내기인 정직원과 인턴사원이 일 년간 카풀을 하며 경험하는 관계의 변화를 그렸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60대 여성이 홍콩에 사는 딸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뒤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책 전반에서 용산 참사, 고용 불안정, 가부장제, 정상 가족 문제 등을 다뤘는데, 그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다.
전작인 장편 『밝은 밤』도 4대에 걸친 여성 연대기다. 식민 지배 등 굴곡진 현대사를 여성 인물들의 관점에서 풀어냈다. “여성주의에 편승해 인기를 누린다”는 일부 지적에 대해 최은영은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한 글을 써야지 마음먹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스며든 여성주의적 시각이 터져 나오는 것”이라며 “범죄 소설이나 SF를 쓰더라도 그 토대는 여성주의일 것”이라고 했다. “모든 여자는 엄마이거나 며느리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게 여성주의적 관점”이라고 했다.
그는 독자들로부터 “위로받았다”라거나 “나도 그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피드백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미묘하게 관계가 어긋나는 순간과 그 순간의 상처를 포착하는 최은영의 관찰력은 누구에게나 연약하고 어린 시기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글은 쓰는 사람에게도 위안이 된다. “10년 동안 글을 썼지만 지금도 ‘마음의 허기’를 원동력으로 글을 씁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즐거운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최은영은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가장 깊게 들여다보는 장르”라고 했다. “어떤 글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 사람의 상처가 내 것과 똑같을까’ ‘그때의 내 마음이 딱 이랬지’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소설만의 것”이라고 했다. 최은영은 구형 폴더폰을 쓴다. “스마트폰이 너무 많은, 자잘하고 쓸데없는 정보를 쉼 없이 전달하면서 정신을 갈아버리기 때문”이란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의 장점은 능동성이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볼 때와 달리 “소설은 읽을 때는 누구나 상상하고 사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은영은 첫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데뷔 소설집 『쇼코의 미소』는 10만 부 넘게 팔렸다. 『내게 무해한 사람』과 첫 장편 『밝은 밤』도 베스트셀러였고, 여러 문학상도 받았다. 그럼에도 최은영은 “몇 부를 팔고 무슨 상을 받는 건 부수적인 기쁨”이라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계속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데서 오는 행복이 가장 크다”면서다.
내후년 봄 첫 에세이집이 나온다. “제 안의 수치스러운 것들을 토해내는 마음으로 쓸 것”이라고 예고했다. “다 잘 될 거라는 식의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의 고백 같은 ‘부끄러운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치부를 낱낱이 까발리는 지옥 같은 과정을 거치더라도, 날 것 그대로의 ‘진짜’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제가 쓴 모든 소설이 결국은 애정결핍에 대한 이야기”라며 “신작 에세이도 애정결핍에 대한 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왜 이렇게 특이할까. 날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작가가 되고 나서야 ‘나도 이런 생각을 했다’고 말하는 분들의 답신을 받았어요. 제 이야기를 읽어주시는 독자가 많다는 게 저를 외롭지 않게 합니다. 글을 매개로 독자들과 마음이 통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에요. 믿기지 않는 선물을 받았다고, 늘 생각합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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