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40대. 오로지 빛을 따라서 한 여행

이마루 2023. 8. 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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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을 할 것인지, 지금 여행의 콘텐츠는 완전히 내 몫이다.

빛을 따라서

연초 연남동에 놀러 갔다가 심심풀이로 본 타로 사장님은 내가 뽑은 마지막 두 장의 카드를 보자마자 무릎을 쳤다. “자, 너무 노력하지 말기. 올해는 아무 생각 없이 빛을 따라가봐요. 이 그림처럼 꽃을 보고 햇빛을 즐기라고요! 아직 젊잖아. 오케이?”

올해는 어쩌면 하는 일마다 타율이 10%도 안 될까? 열심히 한 정성을 봐서라도 좀 잘되면 좋으련만. 낙담하던 중 불현듯 햇살과 꽃의 정령이 가득한 타로 카드 그림이 생각났다. 그래, 너무 열심히 해서일지도 몰라. 가자. 빛과 낭만이 충만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로. 체코 프라하의 뜨거운 블타바 강으로. 마침 6~7월엔 코로나19로 유예됐던 유럽 출장이 두 번이나 예정돼 있었다.

유럽은 학생시절 배낭여행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거의 모든 여행의 조건이 바뀌었다. 미리 환전할 필요가 없는, 즉석으로 충전되는 환전 체크카드와 실물 지도를 대신한 구글 맵, 호텔을 대신하는 에어비앤비. 바뀌지 않은 것이라면 여전히 아름다운 유럽 풍경과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건물, 아날로그 열쇠뿐. 촘촘한 정보로 가득한 〈론리 플래닛〉 가이드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다. 여행을 어떻게 기획하고, 어떤 콘텐츠로 채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됐다.

그렇게 40대 중반, 어쩌면 세월의 뱃살만큼이나 물컹해진 내 인생에서 ‘쨍’한 복근을 만들어줄 유럽 여행이 시작됐다. 내 콘텐츠는 약 150년 전 프랑스 대자연에서 빛을 따라 인생을 불살랐던 선배들, 즉 인상주의 화가들의 족적을 따라가는 여행이었다.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자취를 좇았고, 프로방스에서는 생 빅투아르 산을 따라 세잔의 길을 걸었다. 보나르, 앙리 마티스, 르 코르뷔지에의 흔적을 감상했다. 체코와 오스트리아에서는 빈 분리파와 표현주의의 대가 에곤 실레와 클림트의 세계를 찾아 떠났다. 체코의 작은 도시 체스키크룸로프와 오스트리아 빈의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사제 관계였던 에곤과 클림트의 짧고 강렬한 인생을 만났다. 빛을 따라 나선다지만 가족이 딸린 몸은 20대만큼 가볍지 않다. 학회 발표, 수업, 논문을 바리바리 싸들고, 세 아이들 학원 일정까지 몰려오는 사태에도 하루살이 심정으로 정해진 항로에 몸을 실었다. 20대와 다르게 좋은 점도 있었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슨 일이 닥쳐도 개의치 않을 ‘중년의 여유’가 내 코어에 장착돼 있었다.

프랑스 여행 중 손에 잡힌 책은 정여울 작가가 2019년에 펴낸 〈빈센트 나의 빈센트〉였다. 최근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울림을 줬다. 그는 좋아하던 심리학과 문학, 여행과 미술이 만나는 모든 접점에 반 고흐가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파랑, 노랑, 빨강의 삼원색이 만나 새하얀 빛을 내듯 그의 인생에서 고흐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으로 엮였다.

“나는 나이 서른이 넘으면 신선한 글쓰기의 영감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두려움, 현실의 안정을 위해 가장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해도 좋다. 내가 걸었던 길에 후회가 없다면.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좋다. 내가 걷는 길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내가 디디는 인생의 발걸음 하나하나는 이 그림의 붓질 자국처럼 분명히 흔적을 남긴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던 정여울 작가는 작가의 길을 포기하려고 떠났던 여행에서 결국 반 고흐처럼 타협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이후 성공한 작가로 우뚝 섰다. 그는 자신을 버티게 해준 빈센트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모든 곳에 갔다. 빈센트가 태어난 네덜란드의 쥔더르트, 반 고흐 미술관이 있는 암스테르담, 빈센트가 수많은 밤하늘을 담은 프랑스의 아를, 벨기에 보리나주의 고흐 작업실, 빈센트가 사랑하는 동생 테오와 묻힌 곳까지. 두더지 게임의 방망이를 맞듯 나를 쉴 새 없이 두드려대는 실패의 공포에 하얗게 질릴 무렵, 나 역시 작가가 느낀 위로에 마음이 몽글해졌다.

프랑스가 자연의 빛으로 빛났다면, 체코와 오스트리아는 인간 내면의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에곤 실레는 28세의 짧은 인생에서 100점의 자화상을 그릴 만큼 인체를 해체해 내면의 성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불안을 탐구했다. 그는 종종 “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린다”고 말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비롯해 표현주의 예술은 제1·2차 세계대전 등 역사와 맥을 같이해서 볼 때 더 잘 다가온다. 작곡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으로 유명한 체코의 블타바 강은 민족 정서와 흥을 채워주는 곳이었다. 오랫동안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인구 90%가 체코어를 쓰고, 2004년 EU 정회원이 됐지만 아직도 자국 화폐 ‘코루나(Koruna)’를 사용하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맥주 소비량이 많은 나라. 맥주를 하도 좋아해 양조장까지 운영했던 극작가 하벨이 이끌었던 벨벳 혁명은 소련의 독재로부터 체코인을 해방시켰다.

빛을 맘껏 쐰 덕분일까.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버틸 코어가 바싹 단단해졌을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고 싶다면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자. 탁월하고도 민감한 예술가 선배들의 이야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위로와 격려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은 나처럼 말이다.

이원진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10년간 기자로 일했다.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으며,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 믿는 워킹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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