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무화과가 보이면 이런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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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연 기자]
어릴 때의 기억이다.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커피 시럽을 입힌 땅콩과 함께 빠지지 않던 단골 안주가 있었다. 누렇게 마른 그것을 아빠는 '무화과'라고 하셨다. 무화과? 그 무렵 무심코 따라 부르던 유행가의 가사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 가수 김지애, 몰래한 사랑
남쪽 지방에는 지천에 널린 과일이라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화과를 생과로 본 적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노랫말처럼 건과일이 아닌 무화과는 상상의 과일이나 다름없었다.
좋지 않았던 첫 만남
언젠가부터 9월을 전후로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생무화과를 서울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선뜻 사볼 엄두를 내진 못했다. 낱개로 몇 알씩 팔면 모를까 박스째는 영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친구네서 맛있게 먹었다는 둘째 딸의 말에 겁도 없이 무화과 한 박스를 덥석 질렀다.
무화과는 낯선 생김새만큼이나 낯선 식감, 낯선 맛이었다. 말캉한 식감도 그렇고 애매한 맛도 그렇고. 새콤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별로였다. 게다가 어찌나 빨리 무르던지, 둘째만 맛있다고 몇 알 먹은 게 전부였다.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무르고 터져버린 무화과를 결국 다 버리는 것으로 첫 만남은 끝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엔 디저트에 관심이 많은 첫째 딸이 SNS에 자주 등장하는 무화과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 사이 카페에서 우연히 먹어본 무화과 크림치즈가 나쁘지 않았고, 무화과가 올라간 우아한 수제 케이크도 맛본 터라 한 번 더 시도해 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대신 여섯 알들이 작은 패키지가 있어 쓱~ 주문했다.
▲ 사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꽃송이이다. |
ⓒ 오세연 |
다시 만난 무화과를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대체 내가 모르는 요 녀석의 매력은 뭘까?"
밑은 둥글면서 위로 뾰족한 모양이 애들 어릴 때 쓰던 모자처럼 귀여웠다. 살짝 움켜쥐었다가 무른 느낌에 얼른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그런데 촉감이 새로웠다. 무화과의 보드라운 잔털은 벨벳 같았다.
깨끗이 씻은 무화과를 반으로 가르자 은은하고 우아한 붉은빛의 속살이 드러났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색감이었다. 감성을 아는 듯한 무화과의 비주얼에 일단 반했다.
다시 먹어본 무화과는 말캉하기보다는 부드러웠다. 애매하기보단 은은한 단 맛이 났다. 잘 익은 건 꽤 달았다. 무엇보다 전에는 몰랐던 흙 내음 비슷한 자연의 향이 났다. 예전엔 그래서 싫었는데 다시 보니 그래서 좋았다.
그렇다고 단박에 무화과의 매력에 빠진 건 아니었다. 기회가 있으면 또 먹어도 나쁘지 않겠다, 전에 없던 관심이 생겼다 정도.
▲ 무화과를 올린 그릭 요거트. |
ⓒ 오세연 |
무화과(無花果)란 말 그대로 꽃이 없는 열매를 뜻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듯싶다. 그런데 꽃이 없는데 열매가 생기는 게 가능한 일인가? 관심이 생기니 자연스레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막장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듯 무화과에 대해 알아봤다.
사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게 아니라 꽃잎이 없는 것이었다. 꽃은 꽃잎, 암술, 수술, 꽃받침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갖춘꽃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무화과 껍질로 알고 있는 부분이 무화과 꽃의 꽃받침이고. 그 안쪽의 붉은 부분이 무화과의 꽃, 그리고 그 가운데 자글거리는 알갱이가 무화과의 씨앗이자 열매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화과를 꽃송이째 먹은 셈이다.
안갖춘꽃으로 분류되는 무화과 꽃. 그런데 못 갖춘 게 아니라 안 갖췄다는 건 식물 입장에서 딱히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그럼에도 인간의 입장에서 흔한 꽃 모양이 아니라고 멋대로 꽃이 없는 과일이라고 단정 지어 이름까지 붙여 불렀으니, 무화과에게 미안해졌다. 그럼에도 묵묵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내는 무화과가 달리 보였다.
세상에는 첫눈에 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두 번, 세 번 봐야 반하는 것도 있다. 나에겐 무화과가 그랬다. 그 후로 나는 뭐든 세 번은 더 보자는 주의가 됐다. 그 무엇인가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달라질지 나도 잘 모르니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다. 자고로 '한국인은 삼세판'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 무화과를 잔뜩 올린 무화과 얼그레이 케이크 |
ⓒ 오세연 |
그렇게 두 번, 세 번 무화과를 접하다 보니 이젠 무화과의 계절이 오면 반가운 마음으로 박스째 냅다 사게 됐다. 은은한 매력의 무화과는 어디에든 잘 어울려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다. 그중 몇 가지 방법을 공유하자면 이렇다.
나는 매일 아침 건강을 위해 직접 만든 그릭 요거트를 먹는다. 보통은 냉동 블루베리를 넣어 먹지만, 무화과의 계절엔 생 무화과를 넣고 꿀을 둘러 먹는다. 뭔가 고급지게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 무화과잼을 크림치즈에 섞어 무화과 크림치즈를 만들어 빵에 발라 먹어도 맛있고탄산수에 타서 시원하게 무화과에이드로 마셔도 좋다. |
ⓒ 오세연 |
그러고도 남는 무화과가 있다면 잼으로 만들어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두루두루 먹는다. 크림치즈에 섞어 무화과 크림치즈를 만들어 빵에 발라 먹거나, 탄산수에 타서 시원한 무화과 에이드로 마시고, 우유에 커피와 함께 타서 무화과 라떼로 마시기도 한다. 무화과 특유의 단맛과 향, 그리고 톡톡 터지는 작은 알갱이들이 꽤 매력 있다.
이맘때 즈음부터 카페마다 계절 메뉴로 무화과 디저트와 음료가 쏟아지는 이유다. 기왕이면 장식도 그럴싸하게 해서 홈카페 놀이도 하고,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수다 타임을 갖기도 한다. 그렇게 무화과를 핑계로 일상을 즐긴다. 더 이상 무화과가 무르고 터져서 버리는 일은 없다.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여전히 무화과 하면 입가에 맴도는 노랫말 속 누군가에겐 사랑의 계절이기도 한 무화과의 계절이 돌아왔다. 마트에서 무화과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건 한여름의 절정도 곧 꺾인단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무시무시한 폭염도 기꺼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계절을 온전히 느끼고 즐기며 사는 것이야말로 잘 살고 있다는 방증이라 생각하는 요즘. 올해 첫 무화과를 샀다. 그렇게 나는 계절을 즐길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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