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 최연소 영부인'은 왜 미라가 돼야 했나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Eva Perón, 1919-1952)은 아르헨티나의 여배우이자 정치인, 영부인이었으며, 애칭인 '에비타(Evita)'로도 유명하다. 불과 33년의 짧은 생애 동안, 가난하고 불우했던 환경을 딛고 국민적 사랑을 받는 '에비타 신드롬'의 주인공까지 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지나친 신격화의 부작용으로 사후 에비타의 시신은 '미라'가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이른바 '페론주의'로 알려진 에비타 대통령 부부의 정책들은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에서 '포퓰리즘을 악용한 대중 독재정치의 시발점'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과연 에비타의 실제 모습은 성녀와 악녀, 그 어디쯤에 있을까.
혼외자로 태어나 배우가 되기까지...
8월 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1회에서는 '미라가 된 국민영웅, 아르헨티나의 에비타'편을 통하여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박구병 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에비타는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팜파스에 위치한 로스톨도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1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에바의 아버지는 부유한 농장주였지만 그녀는 불륜으로 태어난 혼외자였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목장 경영이 어려워진 아버지는 자녀들을 버리고 본처에게 돌아가버렸다. 하루아침에 궁핍한 처지로 내몰린 에비타와 형제들은 갖은 고생을 겪으며 주변으로부터 소외와 멸시를 당했다고 한다.
에비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영화배우의 꿈을 키웠다. 1935년, 15세가 된 에비타는 가난과 불공평에서 벗어나 아르헨티나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5년 가까이 고난의 무명생활을 극복한 에비타는 1940년대 들어 당시 인기 라디오 드라마였던 <역사속 위대한 여인들>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TV가 아직 대중화되기 전, 라디오는 가장 인기있는 대중매체였고, 에비타는 여러 라디오 드라마의 주연과 DJ를 맡으며 당대의 '라디오 스타'로 우뚝 섰다.
에비타의 인기비결이자 트레이드 마크는 단연 슬프면서도 호소력짙은 '목소리'였다. "우리는 조바심을 내며 드라마 시간을 기다렸고,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당시 에비타에 대한 청취자들의 실제 평가다. 훗날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에비타가 대중들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그녀의 목소리 덕분이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또한 에비타는 목소리만이 아니라 외모도 뛰어났다. 에비타의 유명세가 높아지면서 연예지 표지 등에 얼굴이 공개되자, 대중들은 그녀의 미모에 더욱 열광했다고 한다. 동료 여배우였던 아니타 호르단은 "에비타는 호수같은 눈, 붉은 입술, 부드러운 목련꽃같은 투명한 피부를 가졌다"며 그녀의 미모를 극찬하기도 했다.
1944년, 라디오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던 에비타의 인생에 두 번째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해 1월 아르헨티나를 강타한 산후안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 행사를 열었다. 이곳에 참석했던 에비타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훗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자 에비타의 남편이 되는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이다.
1930년부터 아르헨티나는 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페론은 엘리트 군장교 출신이자 아르헨티나 최초의 노동복지부 장관을 역임중이던 군사정권의 라이징 스타였다. 지진 모금행사를 주최한 페론은 옆자리에 착석했던 에비타를 처음으로 만났다. 서로에게 한눈에 반한 두 사람은 무려 24세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졌다.
에비타는 페론과의 만남 이후 정권 실세였던 그의 후원을 등에 업고 배우로서 더욱 승승장구했다. 에비타 역시 본인의 인기와 영향력을 활용하여 페론을 돕는 데 앞장섰다. 에비타는 자신이 활동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페론을 지지하는 연설문을 낭독하며 지원에 나섰다. 사실상 에비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며, 페론의 연인을 넘어서 '정치적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들이 페론을 지지한 데는 에비타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와 빈부격차 속에서 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은 열악한 상태였다. 페론은 최저임금제-휴가제 도입-고용 보장-아기날도(Aguinaldo, 연말특별수당) 등의 과감한 친노동 개혁정책을 표방하며 노동자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페론의 입지가 강해지면서 반대파들 사이에서 견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45년 페론은 사회경제적 특권 계층의 '과두 지배'를 비판하는 격한 주장을 펼쳤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당했고 그해 10월 12일에는 체포까지 당하며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페론을 지지하던 노동자 세력은 분노했고 수십만명이 운집한 대대적인 총파업을 벌이며 페론의 석방을 요구했다. 놀란 군부세력은 결국 시위 당일이자 체포 5일 만에 페론을 석방시켰다. 당시 에비타는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공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에게 시위 참여와 페론의 구명을 독려했다고 한다.
페론은 노동자 세력의 확고한 지지 기반을 확인하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한다. 그런데 당시 페론이 석방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에비타와의 결혼이었다. 페론과 에비타는 석방 5일 만인 1945년 10월 17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에비타에게도 배우가 아닌 '정치인의 아내'로서 본격적인 제2의 인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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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으로서 당시 에비타의 활약상은 시대를 앞서간 파격이었다. 1940년대만 해도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대통령 후보의 아내가 선거 유세에 동행한 경우는 에비타가 최초였다. 또한 페론은 피부 질환 때문에 사람들과 장시간 접촉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남편을 대신하여 사람들과 자주 대면하며 친밀감을 쌓는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에비타였다.
에비타는 유세를 거듭할수록 배우 출신답게 특유의 미소로 사람들을 응대했고, 이러한 모습이 무뚝뚝한 페론의 단점을 보완하여 호감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귀여운 에바'라는 의미의 에비타라는 별칭이 아르헨티나 대중들에게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위기감을 느낀 페론의 반대파들은 '흠집잡기'를 위하여 에비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배우 시절 경력을 거론하며 '매춘부'라는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동자와 대중들은 페론 이상으로 에비타를 보기 위하여 몰려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현대의 정치 유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인과 연예인의 시너지 효과'가 처음으로 증명된 것이 바로 페론 부부의 사례인 셈이다.
페론은 1946년 대선에서 52.8%의 득표율을 달성하며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리고 에비타는 26세의 나이에 '세계에서 가장 젊은 영부인'에 등극했다.
페론은 집권 이후 임금인상-사회보장혜택 강화-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을 추구하는 노동자 친화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이는 '페론주의'로 불리우는 페론 통치제제의 근간이자 오늘날까지 남미 일대에 큰 영향을 미친 정치 사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에비타 역시 영부인으로 활동하면서 훗날 '에비타 신화'로 불리우게 되는 전설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에비타의 주요한 정치적 역할은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른바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로 불리우던 가난한 노동자-서민계층을 주로 만나 페론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며 정부의 정책과 이념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이미지 연출에 능했던 에비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전문 작가를 고용하여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연설문을 완성하는 데 공을 들였다. 연설에서는 먼 곳에서도 대중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크고 적극적인 손동작을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에비타의 연설과 대중적 영향력은 페론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에비타는 매일같이 복지부 사무실에 출근하여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다. 서민과 빈민들을 위한 구호활동은 대중들을 크게 감동시켰고 에비타는 '가난한 사람들의 성녀'라는 추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에비타의 명성은 아르헨티나를 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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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유럽 순방은 훗날 에비타에게는 예상밖의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타임지의 보도를 통하여 에비타가 사생아 출신이라는 흑역사가 처음으로 폭로되었고, 그녀가 혼외자라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출생증명서를 조작한 사실도 밝혀졌다. 또한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수상한 만남'을 둘러싸고 에비타의 이면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민감한 내용을 다룬 아르헨티나 타임지의 판매는 몇 달간이나 중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당시 아르헨티나 내에서 에비타의 인기는 굳건했다. 에비타는 정권의 지지도 상승을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에바 페론 복지 재단'을 설립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편지 한 통이면 에비타를 만날 수 있었고, 에비타는 편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생필품에서 주택까지 지원했다.
또한 직접적인 구호활동 외에도 공공시설을 건립하고 교육-의료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등, 아르헨티나의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하여 노력했던 에비타의 공적은 결코 적지 않다. 초기에 500파운드 정도의 예산으로 시작했던 에비타 재단은 불과 3년만에 5000만 파운드(현재 한화 3조 원)로 급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에비타 재단은 이러한 방대한 규모의 복지활동을 위한 재원을 대체 어떻게 마련했을까. 첫 번째는 강제 기부였다. 페론 정부는 노동자들의 1년치 봉급에서 이틀치 임금은 무조건 기부하는 법안을 마련했고, 연간 1%에 이르는 GDP(국내 총생산)를 에비타 재단의 운용자금(현재 한화 8300억)으로 지원했다. 또한 에비타 재단은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2차대전의 나치 독일 전범들을 숨겨주거나 망명을 묵인하는 보호비 대가로 거액의 비자금을 수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에비타 역시 자금 횡령과 사치 의혹에 시달렸다. 에비타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한다는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고급 의상실을 자주 드나들며 드레스와 보석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에비타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 르포인 <탐욕으로 얼룩진 아르헨티나의 성녀 에바 페론>에 따르면, 에비타는 반대파와 언론의 의혹 제기에 대하여 "자선 활동 비용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나는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쓸 뿐, 그걸 세고 앉아있느라 활동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여론이 악화되면서 에비타와 페론은 위기를 타파하기 위하여 점차 '권위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페론 정권은 비판적인 언론을 통제하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우상화 작업에 나섰다. 페론의 통치방식에 반대하던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구금되고 2000여 명에 이르는 대학 교수들이 해고를 당했다. 1950년대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조국 건설, 학생 죽이기'라는 낙서가 곳곳에 내걸리며 페론 정권의 언론과 지식인 탄압을 비판했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등장했던 페론 정권의 실체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또다른 권위주의 세력으로 타락했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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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론 정권은 불리한 여론을 철저히 통제하며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에비타는 여전히 '국민의 영웅'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메이킹하고,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기 위하여 여성정당(페론주의 여성당)을 만들고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약 380만의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했는데 이 중 64%가 페론 정권을 지지한 것으로 분석된다.
에비타의 지지층은 더 나아가 대선을 앞두고 에비타에게 영부인을 넘어 부통령 출마를 권유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에비타의 인기와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에비타의 출마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에비타가 자궁암 선고를 받으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페론의 첫째 아내도 자궁암으로 사망한 바 있어서 페론이 자궁암을 유발할 수 있는 HPV(인체유두종바이러스) 바이러스 보균자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에비타의 역할이 중요했던 페론은, 아프고 쇠약해진 에비타를 데리고 유세를 강행했다고 한다. 에비타의 지원 덕분에 페론은 첫 번째 선거보다도 더 높은 지지를 받으며 연임에 성공한다.
1952년 대통령 취임식에서 에비타와 페론은 함께 오픈카를 타고 행진했다. 당시 에비타는 건강악화로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고,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강제로 몸을 세울 수 있는 코르셋을 입히고 그위를 무거운 코트를 덧입혀서 가렸다. 당시 에비타의 체중은 37kg이었다고 하며 식은땀을 참아가며 힘들어했고 남편 페론의 손길에 의지해야만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취임식 불과 7주 후인 1952년 7월 26일, 에비타는 33살의 젊은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일찍 마감한다. 에비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비탄에 잠겼고 장례식은 한 달에 걸쳐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에비타를 애도하기 위하여 운집한 사람들의 줄이 3km에 달했고 추모행렬은 무려 열흘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에비타>에서 슬퍼하는 국민들을 위하여 에비타가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아요)'는 지금도 그녀의 삶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에비타는 죽음 이후에도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에비타는 죽음 이후에도 남편 페론에 의하여 정치에 이용당해야만 했다. 충격적이게도 페론은 에비타의 시신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하여 방부처리하고 '미라'로 만들어 영구보존을 결정했다.
페론 정권은 에비타 사후 경제위기로 인한 민심 이반으로 지지도가 급락했고 1955년 9월에는 또다른 군부 쿠데타로 끝내 몰락했다. 페론 반대파는 페론의 유산들을 모조리 철저하게 지우려고 했고, 에비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11월에는 돌연 에비타의 미라가 사라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에비타의 미라는 시간이 흘러서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공동묘지에서 훼손된 채로 뒤늦게 발견된다.
1974년 11월 19일, 에비타의 시신은 실종된 지 약 19년 만에야 고국 아르헨티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전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던 에비타의 미라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고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에비타를 둘러싼 의혹과 뒷말은 끊이지 않았다. 에비타가 투병중에 페론에 의하여 강제로 고통과 감정을 억제하기 위한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죽어서도 적지 않은 수난을 겪어야 했던 에비타의 미라는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위치한 아르헨티나의 국립묘지인 레콜레타(Recoleta)에 안치됐다. 에비타 미라가 겪은 방랑의 세월을 반영하듯, 그녀의 묘소에는 평화없는 무덤(La tumba sin paz)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에비타 미라의 수난사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정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21세기에도 페론주의자와 반페론주의자의 갈등으로 심각한 정치적 대립과 경제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에비타와 후안 페론에 대한 평가 역시 지금과 극과 극을 달린다. 에비타와 페론정권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초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큰 이정표를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아르헨티나 경제추락의 원인 제공자'라는 비판적 오명 또한 동시에 따라다닌다.
"저는 단 하나의 커다란 야심을 품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에비타라는 이름이 언젠자 조국의 역사속에 남는 것입니다."
에비타가 생전에 남긴 어록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녀의 바람은 결국 현실이 됐다. 에비타는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악조건 속에서도 여배우와 정치인으로 성공했고, 결국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짧지만 극적인 인생을 산 인물'로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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