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도끼 들었는데도 '집유'…악성 민원 트라우마 앓는 공무원들
악성 민원에 공직 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달 ‘서이초 사태’가 불거진 이후 공직 사회에선 “남 얘기 같지 않다”는 슬픈 공감이 흘러나온다. 일선 공무원들은 매년 4~5만건에 달하는 민원인들의 폭언·폭행에 시달리며 생존까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악성 민원으로부터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해 사전예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9일 대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통해 올해 1~7월 민원인에 의해 발생한 공무집행방해 사건 판결문 56건을 분석한 결과 벌금형이 18건(32.1%),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34건(60.7%)으로 나타났다. 징역형을 선고받고 실형을 사는 경우는 4건(7.1%)에 불과했다.
집행유예 사건이라도 죄질이 가볍진 않았다.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A씨는 ‘손도끼’로 위협을 받아야 했다. 주민센터가 민원인의 모친 빈소를 마련하는 절차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주민센터의 업무영역 밖에 있는 일이다. 민원인이 욕설을 퍼붓자 A씨는 “욕하지 마시라”고 대응했다. 그러자 민원인은 돌연 가방에 있던 37㎝짜리 손도끼를 꺼내 A씨를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재판부는 ‘손도끼를 들었다 바로 내렸기 때문에’ 공무집행 방해의 정도가 무겁다고 보기 어렵다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식칼이나 각목 등을 들고 위협하거나, 욕설과 함께 얼굴·다리 등 신체 부위를 가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 6월엔 파출소에 있는 화분을 깨뜨린 뒤 유리 파편을 휘둘러 경찰관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도 발생했다. 공무집행방해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고, 특히 흉기를 이용한 특수공무집행방해죄는 형량이 2분의 1 가중된다. 하지만 대부분 초범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에 그치기 일쑤다.
공무원들은 풀려난 민원인이 보복하러 돌아올까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부산의 한 구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B씨는 신입 시절 사회복지 업무를 하던 중 민원인에게 멱살을 붙잡혀 질질 끌려간 경험이 있다. B씨는 “한번 난동을 경험한 공무원들은 언제 그 민원인이 다시 나타날지 몰라서 긴장하게 된다. 강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이라며 “실제로 훈방조치되거나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 민원인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그나마도 이렇게 재판까지 가는 경우는 극히 일부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민원인의 폭언·폭행·성희롱 등 위법 행위를 지칭하는 ‘특이민원’ 건수는 전국적으로 2018년 3만4484건에서 지난해 4만1559건으로 4년새 7000건가량 늘어났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었던 2020년(4만6079건)과 2021년(5만1883건)보단 낮아졌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서울의 한 주민센터에서 근무하는 C씨는 “악성 민원이 들어와도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여전히 있다”며 “폭행 등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는 이상 고소는 꿈도 꾸지 못하고 담당 공무원이 홀로 고통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인내 끝에 기다리는 것은 참극이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에서 근무하던 신입 근로감독관은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달엔 경기 동화성세무서에서 한 민원봉사실장이 악성 민원인을 응대하다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실이 인사혁신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극단적 선택으로 순직을 청구한 공무원 수는 2019년 20건에서 지난해 49건으로 2배 이상 확대됐다.
다행히 정부부처를 중심으로 공무원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다. 근로감독 관련 민원이 잦은 고용부는 최근 중앙부처 최초로 ‘특별민원 직원보호반’을 발족해 1대1 맞춤형 보호조치 나서기로 했다. 악성 민원인에 대해서도 기관 차원에서 고소·고발 등 조치를 지원하기로 했다. 국세청도 최근 전국 133개 세무서 민원봉사실에 증거 수집용 녹음기를 보급했다.
전국 지자체들도 민원실에 실시간 촬영이 가능한 ‘보디캠’을 보급하거나 악성 민원 대응 훈련을 실시하는 등 보호책을 잇달아 수립하고 있다. 박유정 행안부 민원제도과장은 “지난해 민원처리법을 개정해 안전장비 설치 등 의무적 조치사항을 구체화하는 등 안전한 근무환경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일선 공무원들은 악성 민원을 사전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관계자는 “녹음이나 보디캠 등 조치는 ‘사고가 나면 증거를 수집하라’는 차원이지, 근본적인 사전 예방책이 될 수 없다”며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물리적으로 제지할 수 있는 청원경찰 등의 인력이 상주해야 하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공무집행방해의 특성을 고려해 사법적으로도 엄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콜센터 상담 직원들에 적용되는 감정노동자보호법과 같이 공무원을 민간 서비스 노동자에 준하게 보호할 수 있는 법률적 장치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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