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신과 국정 철학, 요즘 더욱 그리워져"
오는 2024년 1월 6일은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되는 날이다. 이에 관련 서적 출간, 다큐 영화, 연극, 서사 음악회 등 전국 규모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마을(다음카페)’ 운영해 오는 필자는 지난 6월 ‘김대중 생애 사진전’을 열었다. 오늘은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회고를 통해 ‘70~80년대 김대중의 수난’을 살펴보았다. <기자말>
[조종안 기자]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좌담하는 김의겸 의원 |
ⓒ 조종안 |
김의겸(61) 의원은 전북 군산 출신이다. 그는 군산에서 초중고 마치고 서울로 유학, 1982년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한다. 전두환 군부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1985년 법과대학 학생회장이 된다. 이후 각종 시위에 참여하면서 구속 수감되기도 하는 등 운동권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대학 졸업 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사회부, 국제부, 정치부 등을 거쳐 논설위원을 지냈다.
그는 1992년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 출입 기자로 김대중 후보를 밀착 취재한 경험이 있으며, 2018년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김 의원은 초등학교 때 김대중(DJ)을 처음 알았단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대학 시절엔 먼발치에서 봐오다가 가까이서 보기 시작한 것은 기자가 된 후였다. 그 이전까지는 온갖 수난과 정치적 탄압을 인동초처럼 이겨낸 강한 인상의 정치인으로 알고 있었으나 직접 만나보니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 달리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풍겼다는 것.
▲ 전시장 사진을 돌아보며 소회 밝히는 김의겸 의원 |
ⓒ 이가령 |
군산에서 열린 DJ 생애 사진전을 돌아본 김 의원은 의문의 교통사고(1971), 동경 팔레스호텔 납치사건(1973),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정(1980), 김대중 후보 유세 때 청중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군산월명종합경기장(1987), 군산 중앙로에 내걸린 김대중 사면복권 환영 현수막(1987), 대통령 당선 확정 후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손들어 답례하는 모습(1997) 등의 사진이 남다르게 느껴진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 의원은 "'DJ 납치사건'과 '1980년 광주의 비극' 역시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됐다"고 부연했다.
▲ 김대중 납치사건 보도한 1973년 8월 14일 자 <동아일보> |
ⓒ 조종안 |
"디제이가 일본에서 납치됐다가 5일 만인가 살아 돌아왔죠. 그때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지요. 아버지께서 신문(한국일보) 기사를 보시더니 나쁜 놈들, 이렇게 무도한 짓을 하느냐면서 화내는 겁니다. 그때 옆에서 들으면서 납치된 분(김대중)이 대단한 인물인 것을 짐작했죠. 그전에는 어렴풋이 알았지만, 수난의 삶에 관심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 군사재판 모습(1980년 9월) |
ⓒ 김대중 평화센터 |
1980년 5월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의 하나로 DJ를 비롯한 민주인사 20여 명을 구속,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죄명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광주 사태'를 일으켰다는 것. 이후 신군부는 모진 고문을 통해 관련자들 진술을 조작하였고, 그해 9월 17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DJ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 옥중에서 가족과 면회하는 사진 설명하는 김의겸 의원 |
ⓒ 이가령 |
김의겸 위원이 가리키는 사진은 DJ가 사형수 시절이던 1981년 청주교도소에서 창살을 사이에 두고 아내와 두 아들을 면회하는 장면이다. <김대중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DJ는 감옥에 있으면서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위장 교통사고로 다친 고관절 통증 때문에 괴로움을 크게 겪는다. 통증도 더욱 심해져 다리가 붓고 쥐가 자주 났다. 스트레스로 인한 이명 증세도 계속됐다고 한다.
김의겸 의원은 김홍걸(DJ 막내아들) 의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당시 DJ 가족들은 실제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80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김홍걸 의원이 저에게 해준 이야기예요. 이때 진짜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알았답니다. 광주에서 민간인 수천 명을 죽여 없애버린 신군부였기 때문에, 디제이 한 사람 죽이는 것이야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겠죠. 그래서 아들들은 신군부가 DJ에게 반성문 한 장 쓰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아들들도 '아버지 그냥 쓰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죠.
홍걸이 말로는 면회하러 갔더니 아버지(DJ)는 죽으면 죽었지, 반성문은 쓸 수 없다. 그냥 죽겠다는 심정을 밝혔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돌아가시더라도 쓰지 마시라고 했답니다. 홍걸이가 몇 번 면회하러 갔는데 그가 없는 걸 보니 다른 사진인 것 같습니다. 김홍걸 의원이 저랑 동갑이거든요. 1980년 그해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니까요."
▲ 군산 월명종합경기장에서 유세하는 김대중 평민당 후보(1987) |
ⓒ 조종안 |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항쟁 등 국민의 희생을 담보로 어렵게 되찾은 직접 선거였다. 그러니 축제 분위기로 치러졌어야 했음에도 지역감정 부추기는 유언비어와 흑색선전, 폭력이 난무했다. 군산 역시 여당의 부정행위가 꼬리를 이었다. 선거 앞두고 통장들이 일괄 사표 제출하고, 여당 후보 돕다가 선거 끝나면 다시 임용되던 시절이었다.
"1987년은 제가 대학교 4학년 때로 그해 대통령 선거는 감옥에서 결과를 지켜봤죠. 민정당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돼서 1988년에 석방됐거든요. 저의 어머니가 구속자 학생들 어머니들 모임 회원이었죠. DJ가 군산에 와 월명공원에서 있었던 행사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셨어요."
김 의원은 전시장을 돌아보며 한 장면, 한 장면 사진이 바뀔 때마다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국정을 전쟁 쪽으로만 몰고 가는 윤석열 대통령과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을 지적하며 "요즘 들어 DJ의 평화 통일 정신과 국정 철학이 더욱 그립다"고 덧붙였다.
"DJ는 워낙 큰 거인이잖아요. 사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 어디 한 군데 그늘을 안 드리운 곳이 없죠. 그런데 요즘 드는 간절함, 이건 평화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미국과 우리의 관계,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평화는 제쳐두고 전쟁 쪽으로만 몰고 가는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니까 DJ 정신과 국정 철학이 더욱 그리워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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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김대중 자서전>(2010),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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