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화 속 여성들과 남자 편집자가 만났을 때
'편집자가 독자에게'는 출판편집자들이 직접 시민기자로 가입해 쓰는 출간후기입니다. <편집자말>
[김경훈 기자]
통상 편집자란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책상 앞에서 원고를 읽고, 비문과 오탈자를 바로잡는 모습일 것이다. 물론 그것도 편집자의 일이지만, 사실 교정·교열은 편집자가 하는 수많은 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편집자는 어떤 책을 누가 쓰면 좋을지 기획하는 일부터 대상 독자를 염두에 둔 카피와 홍보 방안을 생각하는 마케팅까지, 한 권의 책이 이 세상에 나와서 독자 손에 들어가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고백하건대, 그 모든 일에서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많은 직장인이 그렇듯 '필요하니까 하기는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반대로 '편집자라서 좋은 점들' 또한 분명히 있다. 이 글은 그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다.
신화 속 여성들, 다시 들여다보니 흥미롭네
▲ <규방의 미친 여자들> 표지. |
ⓒ 한겨레출판 |
사실 내가 작가님께 제안했던 아이템은 '여성서사 쓰는 법'이라는 일종의 작법서였다. 그러자 작가님이 작법서는 쓸 수 없을 것 같다면서 거꾸로 제안하신 아이템이 지금의 책인데, 원래 시작점이 '여성서사'였기에 이 책을 작업하면서 여성서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여성서사 쓰는 법' 기획을 제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성서사가 정확히 뭐지?'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통 여성서사라고 하던데, 생물학적 성별만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면 여성서사가 되는 건가?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의 의미가 분명히 있지만, 그게 크게 진보적인 이야기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 질문의 해답을 얻고 싶어서 '여성서사 쓰는 법'이라는 아이템을 제안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전이 숨어있는 <박씨전>
그런 점에서 작가가 짚은 여러 고전 중에서도 <박씨전>이 인상 깊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여성 주인공 박씨가 서사를 이끄는 고전소설이다. 이 책은 <박씨전>이 '명예 남성'의 성공담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서도, 그렇게만 볼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한다.
박씨는 시아버지와 국왕이라는 두 가부장의 권위를 빌려 가문에서 인정받고, 남편이 밖에서 국왕을 모시는 동안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끌며 '여성 가장' 역할을 한다. 소설에서 박씨의 아버지는 등장하지만 박씨의 어머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박씨는 "남성의 세계에 받아들여진 여성, 명예남성이자 '아버지의 딸'이다."(256쪽)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시작된다. "<박씨전>에서 박씨의 대척점에 선 인물은 적국의 왕이 아닌 그의 아내, 호귀비다. 그리고 박씨와 호귀비는 각각 계화와 기홍대라는 유능한 '여성' 후계자를 길러낸다. 남성 영웅을 대체하는 단 한 명의 탁월한 여성 영웅이 아니라 그를 적대하는 다른 여성 영웅과 그들의 제자 등 다양한 여성 영웅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내가 쓴 보도자료 문구 중)
나는 이런 해석이 흥미로웠다. 어릴 때 읽었던 <박씨전>을 명예남성의 성공담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다시 그 해석을 뒤집으면서 또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박씨라는 뛰어난 여성이 혼자 성공하는 일종의 '능력주의 서사'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여성 영웅의 길을 열어주는 연대의 서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연대만 하는 게 아니라 갈등도 벌인다는 점에서 입체적이라고 생각했다.
〈바리데기〉 설화도 곱씹어 볼 지점이 있다. 〈바리데기〉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뒤 양부모 슬하에서 자란 바리가 친아버지의 병을 고칠 약을 찾기 위해 저승을 여행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고, 마침내 친아버지를 구한 뒤 자신은 신이 되는 내용이다. 너무 유명해서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이전에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바리데기〉의 일면을 짚는다. 바리가 저승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만나고 돕는 이들이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노인들"(42쪽)이라는 점이다. 바리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친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가엾고 불쌍한 오갈 데 없는 혼들과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인도하는 만신의 왕, 무조신이 되기를 택한다."(44쪽)
나는 '이게 바로 여성서사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자칫하면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에게만 유난히 무거웠던 부양과 돌봄의 부담을 정당화하는 말일 수 있다. 돌봄을 여성들이 많이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근거로 '돌봄은 여성적인 일이다'라고 말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
다만 바리가 자신의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난받은 또 다른 이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야기라서, 나는 좋았다. 바리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 마침내 신이 됐기에 위대한 게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기에 위대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연대하는 여성들도 의미있지만, 갈등하는 여성들 모습도 의미있다(자료사진). |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
이 책에 추천사를 쓴 박서련 소설가(<체공녀 강주룡> 저자)는 2022년 2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임파워링(empowering, 힘 돋우기)'이 되지 않는 여성서사에 관심이 있어요. 지지부진하고, 돈도 별로 없고, 승진하지 못했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해야 하고, 늙으면 돌봐줄 사람도 없는. 멀리하고 싶지만, 사실 멀어질 수 없는 우리 삶의 이야기요."
그녀는 "지금은 여성이 서로 적대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여성들 위주의 작품이라면 서로를 깊이 미워하는 모습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도 했다.
이 인터뷰에 많이 공감했다.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의 이야기', '여성들의 연대'가 지닌 의미가 있지만, 그것만이 여성서사라고 주장하다간 자칫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여성과 그들이 맺는 다양한 관계를 배제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었다.
▲ <규방의 미친 여자들> 원고를 읽으며 동시대 여성들의 고통을 잠깐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사진은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5일이 지난 21일 '추모행진'에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모습. |
ⓒ 권우성 |
여성서사에 대한 내 나름의 결론이 그리 대단하거나 깊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직장인으로서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일 수 있다.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일본에서 고독사하는 사람 중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에 대해 "오랫동안 사회인으로 살아온 남성이 익힌 '사회성'은 왜 노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물은 뒤 "남성은 '회사인'이지 '사회인'이 아니라"고 답한다(<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84~85쪽).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남성/여성을 떠나 내 주위 친구들을 봐도 직장 생활이 길어질수록 '회사인'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회사, 기껏해야 업계 안에만 시선이 머물 뿐, 그 범위를 벗어난 사회 문제는 알지도 못하고, 고민하지도 않는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편집자는 '직업적으로' 이런 문제를 고민할 수 있다.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고전 작품을 다뤘지만 '여성서사'라는 문제의식으로 이 작품들을 해석하고 있기에, 원고를 읽는 동안 나는 회사 사무실이 아니라 2023년의 한국 사회에 연결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레즈비언 부부(!)를 다룬 <방한림전>을 읽으면서 여전히 굳건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생각했고, 옛 여성들의 노동요라 할 수 있는 부요에서는 '며느리'로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들의 고통을 잠깐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책의 본질 아닐까. 평소엔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좁은 생활 반경 너머의 세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실존하고 있으며, 그들과 우리가 똑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연결의 감각'을 일깨워 주는 것 말이다. 나 또한 늘 그렇듯 책을 통해, 책의 세계 속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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