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레코드]"가까이, 스며들다" 이병헌의 순간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민대표 영탁役
평범한 소시민, 꼬질한 엠자탈모 분장
"장난스러움·순수함 유지하려 노력"
'제대로 싸워본 적 없는 보통 사람들의 개싸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시나리오에 적혀 있는 문장이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인물은 배우 이병헌(53)이 연기한 영탁이다. 퀭한 눈에 얼룩덜룩한 얼굴, 삐죽 뻗은 머리카락에 앙다문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영탁은 평범한 소시민처럼 그려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광기를 내뿜으며 관객의 멱살을 잡는다. 그 에너지가 엄청나다. 이병헌은 눈 밑 떨림, 볼에 이는 경련으로도 감정을 표현한다. 눈빛은 순수하면서도 총기 있게 반짝인다. 영화는 그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를 알게 하는 동시에, 그를 통해 그리는 재난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고 아득한지 비춘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아시아경제와 만난 이병헌은 "평생 루저로 살아온, 누구 앞에 나서본 적 없는 영탁이 리더가 돼서 완장을 찬다. 엄청난 책임감을 가지게 되다가 서서히 권력의 맛을 본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기에 서투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오는 9일 개봉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파트 한 동에 생존자들이 모여 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2014년 연재된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영화로 각색했다. 영화 '잉투기'(2013) '가려진 시간'(2016)을 연출한 엄태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꽤 멋있고 사뭇 분위기 있는 이병헌은 없다. 어느새 꾀죄죄하고 순박한 영탁만 있을 뿐. 눈 밑에 늘어진 거뭇한 주름과 퀭한 얼굴은 도통 분장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이다. 이를 언급하자 그는 "그거 제 얼굴일걸요?"라며 호방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팬들이 실망해서 탈퇴하면 어떡하냐"고 앓는 소리를 해댔다.
이병헌은 "엠(M)자 머리 스타일과 꾀죄죄한 떼는 분장의 도움으로 표현했다. 잘 보면 평평하던 머리카락 각도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점점 선다. 권력이 세지면서 카리스마도 생기고 그게 맞춰서 머리도 더 세우자는 의견을 냈다. 무언가에 취해가는 느낌을 내기 위해 눈 밑도 빨갛게 분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무시무시한 연기로 엄청난 에너지를 낸다. 인간적이면서도 카리스마 넘치고, 천연덕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면모를 지닌 영탁을 자신만의 색채로 완성한다.
아파트 주민들이 자신을 대표로 추앙하자 영탁은 달라진다. 본의 아니게 완장을 찼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고개를 든다.
영탁이 특이한 인물은 아니길 바랐다는 이병헌은 "내면에 화가 가득하고 상실감, 우울함이 가득한 불쌍한 소시민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 고개를 돌리면 내 옆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래야 관객이 감정 이입을 할 거라고 봤다"고 했다.
이어 "극단적인 선인, 악인은 영화에 없지 않나. 조금씩 나쁘고, 좋고. 그런 인물들이 모여서 보이는 감정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영탁은 극한의 재난 상황에서 관객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영탁이 극단적인 상황과 마주했을 때 잡고 있던 감정의 끈이 '뚝' 하고 끊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변화돼 가는 모습이 영화의 재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탁이 마이크를 잡고 윤수일의 '아파트'(1998)를 부르는 모습이다. 이병헌의 얼굴을 꽉 채운 클로즈업 샷에서 점점 멀어지는 장면에서는 감탄이 터진다. 박서준은 앞서 진행된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장면을 촬영장에서 바라봤다고 말했다. 박서준은 "리허설처럼 진행한 테스트 촬영분이 최종 완성본에 포함됐다"며 감탄했다. 이를 언급하자 이병헌은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라며 말을 이었다.
"엄태화 감독님은 카메라를 돌리면서 리허설을 하시더라고요. 특이하시다, 생각했는데 그게 효과를 발휘한 장면이죠. 리허설 때 연기한 장면을 오케이(OK) 하셨어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어요. 영탁이가 노래를 부르면서 플래시백(과거 회상을 나타내는 기법)으로 예전 모습으로 넘어갔다 오면서 천천히 빠지잖아요. 극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퀀스예요. 또 중간에 공익광고처럼 나오는 장면도 재미있죠."
이병헌의 페이소스는 블랙 코미디에서 세차게 폭발한다. 배우가 느낀 연기 갈증이 장르와 만나 시너지를 발휘한 셈이다. 그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시나리오를 읽고 신이 났다. '그래, 내가 블랙코미디 장르를 좋아했지' 기대감도 들었다. 중간중간 웃기는데 긴장감은 해소가 안 되고 갈수록 커진다. 또 피식 웃기기도 하는 장르가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영화를 본 일부 관객은 '안구(눈알)를 갈아 끼운 연기'라며 재치 있는 평을 전하기도 했다. 이병헌은 "뭔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애쓴 적은 없다"며 "반응을 보며 '내가 그렇게 달라 보이나' 놀랐다"고 했다.
"이런 배우, 저런 배우가 있어요. 이를테면 병 모양이 다르니까, 물을 넣으면 그 모양에 맞게 담기는 거죠. '나는 어떤 스타일의 배우지?' 막연하게 궁금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어떤 스타일이 좋고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죠. 배역의 삶에 젖어 들면서 내면에 가까이 접근하도록 노력했어요. 그러면서 인물을 만들어가요.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배우, 그게 중요하죠."
매 작품, 역할 이병헌은 없다. 배우가 지닌 이미지가 강렬하건만, 어느새 온전히 새로운 인물로 다가온다. 그가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순수해서다. 이병헌은 불순물 없이 순도 높은 감정을 내는 비결로 순수함을 꼽았다.
그는 "'모든 사람한테 10살짜리 아이가 있다'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이 때 할 수 있는 생각을 없애기보다 장난스러움, 엉뚱함 등 아이 같은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이병헌은 일각 호평의 공을 엄태화 감독에게 돌렸다. 그는 "영화는 감독 예술이 맞다. 동시에 종합 예술이기에 배우의 몫도 있다. 배우로서 촬영장에서 배역의 눈빛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이와 분장, 조명, 의상 등 모든 게 맞아 줘야 시너지가 난다. 모두가 열심히 했을 때 최상의 결과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독님이 개봉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영화를 놓지 않고 열심히 후반 작업을 한 게 큰 빛을 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이러니하게도 기다림이 큰 힘이 됐다"고 덧붙였다.
여름 시장에 수백억원이 투입된 한국영화 4편이 동시기 개봉해 맞붙는다. 마지막 주자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나선다. 주연배우로서 책임감도 남다르다. 이병헌은 "지금 개봉하게 될 줄 누가 알았냐"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보다 더 일찍 개봉할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개봉 앞두고 몰래 마스크를 쓰고 모니터 시사회 때 뒷자리에서 관객 반응을 지켜보기도 했어요. 그때보다 지금 완성도가 좋아요. 감독님이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이후에 편집실에서 볼 때마다 편집 점부터 음향까지 영화가 또 달라지는 거예요. 점점 더 완벽에 가까워지는 영화를 보며 놀랐어요. 이제 관객 반응이 궁금해요. 극장에서 어떻게 봐주실지 기대됩니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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