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에 걸린 中경제]⑦미·중 패권 가를 '첨단기술'...승자는 누구?
국제 분업화된 반도체 공급망…中 타격 커
잃을 게 많은 美中 '전면전' 가능성은 작아
中 기술개발 촉각…전문가 전망 엇갈려
첨단기술 분야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이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미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고,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는 중국은 첨단산업에 들어가는 광물 수출을 통제하며 맞불을 놓는 중이다. 잃을 게 많은 미국과 중국이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작지만, 상당 기간 갈등을 이어가며 전 세계 첨단 산업과 공급망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중 패권 다툼의 결과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중국의 반도체 자립은 시간 문제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미국이 치밀하게 봉쇄하고 있는 만큼 중국이 반도체 자립에 성공해 나가더라도 미국과 동맹국들의 첨단 반도체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미국, 中 첨단산업 집중 타격…'효과적'
현재 미국의 대중 정책 기조는 '디리스킹(위험 제거)'이다. 경제 모든 분야에 걸쳐 중국과 완전히 분리하는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아니라, 일반적인 산업에선 중국과 협력하되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는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지난 5월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이후 미국은 이같은 기조 아래 중국에 규제와 소통 전략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선 중국의 부상을 견제해야 하지만 경제적으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디리스킹이 최선의 전략인 셈이다. 특히 미국이 중국에 첨단기술 수출 규제를 하려면 유럽 등 동맹국의 협력이 필요한데, 디커플링 전략으로는 대중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을 설득하기 힘들다. 그래서 미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위협이 되는 중국의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과 공급망 분야만 타깃해서 함께 대응하자는 '경제안보'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미국이 강력한 대중 규제를 추진하면서도 최근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 쟁쟁한 인사들이 중국을 잇달아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올해 100세를 맞은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대표적인 '중국통'인데다 중국에선 '오랜 벗'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어서 지난달 20일 직접 중국을 방문한 것을 두고 일각에선 미·중 관계 개선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소통 측면의 행위일 뿐, 규제는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문제는 중국 입장에선 디커플링이든, 디리스킹이든 손 놓고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실제 중국 내부에선 디리스킹과 디커플링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의견도 많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서방국가의 제재에 정면으로 맞서 자체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는데, 미국의 이런 첨단기술 수출 규제는 기술 발전에 치명적이다. 무엇보다 미·중 패권 다툼의 핵심 분야로 꼽히는 반도체의 경우 소재, 장비, 기술 등 여러 국가의 협력이 필요한 산업이기 때문에 반도체 강국인 한국, 미국, 대만, 일본 등의 규제가 중국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중국이 최근 갈륨과 게르마늄에 대한 수출 통제를 시작한 것도 첨단 반도체 규제에 대한 맞대응이다. 갈륨은 연구 단계에서 주로 사용되고 게르마늄은 다른 나라에서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직 큰 타격이 없지만, 추후 중국이 희토류 등 다른 광물로까지 통제를 확대하면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핵심 원자재 보고서 등을 보면 중국은 초전도체 등에 사용되는 희토류 15종 포함 핵심 원자재 51종 중 33종에서 세계 1위 생산국이다. 희토류의 일종인 테르븀, 디스프로슘 등은 중국이 100% 공급하는 독점 소재다.
미국은 지난해 10월부터 18㎚(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이하 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등 첨단 장비 수출 통제를 시작했고, 앞으로 반도체, AI, 양자 컴퓨터 분야에서 미국 기업의 중국 투자를 금지하는 행정명령도 발동해 중국 산업을 고사시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 여기 대응해 첨단산업에 들어가는 리튬, 희토류, 흑연 등 수출까지 통제한다면 미국뿐 아니라 한국도 타격이 크다. 당장 흑연만 수출을 막아도 한국의 대미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기차 배터리 생산이 막힌다.
미국·중국 모두 '전면전' 가능성은 작아
다만 당장 미국과 중국이 심각한 전면전으로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 경우 두 나라 모두 타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이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으로 규제의 수위를 조절하고, 중국이 갈륨과 게르마늄으로 '경고 사격' 정도의 대응만 한 것도 전면전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은 중국 매출이 중요한 자국 기업과 정치적 유불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중국도 최근 경제 회복이 부진한 상황에서 성과와 기술발전을 위한 협력이 절실하다.
안유화 중국증권행정연구원 원장은 "중국은 아직 전 세계를 적으로 만들면 안 되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아주 결렬된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며 "앞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티격태격하며 갈등이 강해 보이지만 서로 전면전으로 가는 것은 피하기 위해 뒤에서 거래하는 상태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中, 규제 뚫고 기술개발 사실상 힘들어
전문가들은 이런 가운데 미국의 공급망 확보 노력과 중국의 자체 기술 개발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핵심 물자 공급망을 확보해서 중국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디리스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2026년까지 약 9조1000억원을 광물자원 확보에 투입하기로 했다. 또 중국은 자체 개발한 28㎚ 노광장비를 올해 연내 출시하려고 계획하는 등 반도체 규제 돌파를 꾀하는 한편, AI 개발에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기술력·자본과 중국의 절실함 중 어느 쪽이 빠른 성과를 낼 수 있느냐가 앞으로 미·중 기술패권 경쟁을 좌우할 핵심 이슈인 셈이다.
상당수 전문가는 미국의 강도 높은 반도체 수출 규제가 이어지면 중국 자체 기술 개발이 사실상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업계에서는 중국이 (선진국 수준의) 반도체 기술을 자체 개발하려면 10~15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보는데 그 시간이면 한국이나 미국, 일본, 네덜란드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유할 것"이라며 "현실적으로 반도체 자립은 힘들고, 레거시라고 하는 비첨단 반도체 제품을 대량 생산, 소비하는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이 자원을 활용해 대응하기도 쉽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허 교수는 "지금도 고립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중국이 희토류 등까지 전면적으로 수출 제한하면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비용이 조금 올라가더라도 자체적인 공급망을 형성하기 시작할 수 있다"며 "그럼 중국으로선 협상 카드를 잃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분업구조가 강한 편이다. 미국이 설계·장비, 일본이 소재·장비, 우리나라와 대만은 제조에 높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국가가 중심이 된 '칩4' 반도체 동맹이 대중 견제를 이어가면 중국은 버티기 힘들 것이란 분석이 다수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의 TSMC 설립자 모리스 챙 전 회장은 지난 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칩4와 네덜란드가 중국의 모든 급소를 쥐고 있다"며 "반도체 경쟁에서 중국은 이길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중국의 반도체 등 첨단기술 개발이 좌초되진 않을 것이란 분석도 많다. 중국이 강점을 지니고 있는 시장이나 자원이 미국과의 협상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 안유화 원장은 "중국은 전 세계로부터 고립당했던 시절에도 핵 개발에 성공하고 우주선을 발사했다"며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기술 개발을 막기는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기술이 곧 국가 안보로 연결되기 때문에 중국이 과거처럼 기술을 쉽게 얻을 순 없다"며 "중국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많은 부분에선 스스로 원천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원 기자 nest263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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