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사드 봉합' 뒤엔, 文 ‘평창 로드맵’…北 설득하려 역산

정진우 2023. 8. 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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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 평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평창 올림픽 개회식장에 입장하는 북한 선수단, 뜨겁게 환영하는 남북 공동응원단, 세계인들의 환한 얼굴을 상상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기조연설의 마지막을 '대북 러브콜'로 끝맺었다. 북한 선수단이 올림픽에 참가하고 남북이 응원단을 공동으로 꾸려 평창을 남북 화합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일방적인 제안 이외엔 북한 선수단의 올림픽 참가를 유인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가 ‘평창 평화 로드맵’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역할론에 기댄 이유다.


北만 바라본 文…사드 갈등 어설픈 봉합


실제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 직후 청와대는 한·중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협의에 속도를 냈다. 당시 중국은 한·미의 사드 배치에 반발해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 명령) 등 보복 조치에 나선 상황이었다. 한국은 사드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갈등 해소를 시도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이같은 상황임에도 정부는 2017년 10월 31일 ‘한·중 관계 개선 협의’를 가진 뒤 “사드 갈등이 봉인됐다”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의 갈등 봉합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잠시 가리는 미봉책에 가까웠다. 실제 한·중 관계 개선 협의 직후 배포된 결과 자료에도 “중국측은 사드 체계를 반대한다고 재천명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당시 3불(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 체계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지 않음) 입장을 발표했는데, 그럼에도 중국은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라”며 추가 조치까지 요구했다. 사드 기지의 X밴드 레이더가 중국 본토를 탐지할 수 없도록 운용을 제한하라는 의미였다.

한중관계개선협의를 통해 사드 갈등을 봉합한 직후인 2017년 11월 11일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사드 갈등을 둘러싼 협상 성적표는 초라했지만 반대급부로 한·중 고위급 접촉의 길이 뚫렸다. 2017년 10월 한·중 관계 개선 협의 직후인 11월 11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별도의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이틀 뒤엔 문 대통령과 리커창(李克强) 당시 중국 총리의 회담이 이어졌다. 11월 22일엔 한·중 외교장관 회담도 열렸다.


숨 가쁜 고위급 접촉, 화두는 "평창올림픽"


정부는 연쇄적인 고위급 회담을 소화하는 동안 줄곧 평창올림픽을 화두에 올렸다. 한·중 정상회담에선 시 주석의 올림픽 참석을 요청하고, 외교장관 회담에선 평창올림픽을 ‘평화의 올림픽’으로 만드는 데 합의하는 식이었다. 2017년 12월 문 대통령은 국빈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개최한 한·중 정상회담에선 중국의 ‘약속’도 받아냈다. 한·중 정상회담 직후 당시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위해 한·중이 함께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 2월 북한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평창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이같은 과정은 얼핏 사드 갈등을 봉합함으로써 한·중 관계가 개선되고, 이를 통해 평창올림픽에 대한 중국의 대북 협력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순서가 반대였다고 한다. 정부가 2018년 2월 열리는 평창올림픽을 기준점 삼아 북한 선수단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절차와 소요 시간을 역산해 움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에서 한·중 사드 갈등을 평창올림픽 개최를 비롯한 남북관계 개선의 걸림돌 정도로 인식했다는 의미다.

익명을 요청한 정부 당국자는 “중국과의 사드 협의 당시 내부적으론 2017년 11~12월에 예정된 APEC정상회의와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전에 어떻게든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강했다”며 “정해진 외교 일정을 기준으로 역산했을 때 2017년 10월에는 사드 갈등을 해결해야 했는데, 양국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은 탓에 결국 ‘일단 덮고 가자’는 식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터져 나온 '사드 악재'…文 외교안보라인 겨누나


2018년 평창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이 참가하며 남북 선수단이 올림픽 개회식에 공동으로 입장했다. 연합뉴스
어설프게 봉합했던 사드 갈등은 이후에도 한·중 관계의 발목을 잡는 만성적인 악재가 됐다. 특히 사드 추가 배치까지 언급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엔 사드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비화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사드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사드 기지 정상화를 고의로 지연시키고, 중국 측에 3불1한을 약속했다는 의혹이 커지면서다. 지난해 4월 당시 원일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수석부대변인은 “(3불1한을 합의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 군사주권을 침해한 심각한 사안이다. 합의 당시 내용에 관여한 당사자들이 실체적 진실을 국민에게 밝히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중 사드 갈등에 더해 문재인 정부 당시 사드 정상화 고의 지연 의혹이 불거졌다. 중앙포토

어설프게 봉합했던 한·중 사드 갈등 역시 재차 수면에 올랐다. 지난해 8월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노골적으로 ‘사드 3불1한’을 요구하며 압박 강도를 높였다. 정부는 중국과의 협의에선 “사드 3불1한은 약속이나 합의가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고, 내부적으론 문재인 정부 당시의 한·중 사드 협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은 지난달 문재인 정부가 사드 기지 정상화를 고의 지연했다며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국가안보실 차원에서도 진상 파악을 위해 사드 기지 정상화 지연 의혹을 자체 조사중이다. 감사원이 정식 감사에 착수하고 이를 토대로 검찰 수사까지 이뤄질 경우 칼날은 사드 기지 정상화 지연은 물론 3불 1한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라인을 정조준할 가능성이 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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