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경의 에듀 서치] 킬러문항 배제론 한계… 5지 선다 줄세우기 수능 대수술 필요

이도경 2023. 8. 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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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수험생이 마치 육상 선수가 귀를 세우고 출발선에서 총성을 기다리듯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 시작종을 기다리고 있다. 수능은 육상경기처럼 시간과의 싸움이다. 5지 선다형 문항을 기계적으로 해결해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 풀이 시간을 확보해야 고득점을 기대할 수 있다. 연합뉴스

30년전 80만명 도전 시기에 도입
저출산·핵가족 시대와 맞지 않아
표준·백분위 점수 서열화 도구 전락

‘정답 찾기’ 반복 학습… 창의력 방해
공교육, 학교·학부모와 연계해
학생 소질 찾아주는 역할 전환 절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올해는 특히 출제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상위권 수험생을 변별하기 위해 과목별로 출제해온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 출제가 대통령 지시로 금지됐기 때문입니다.

수험생에겐 갑작스러운 변화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수험생들은 매년 수능 출제 기관이 내는 모의평가를 두 차례 봅니다. 6월 모의평가는 수시 지원 때 중요한 참고 자료, 9월 모의평가는 최종 리허설이죠. 하지만 6월 모의평가는 ‘킬러문항 배제 방침’이 적용되기 전 시험이어서 올해는 9월 모의평가 사실상 한 번뿐입니다.

혼란은 안타깝지만 무익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공교육만으론 준비하기 힘든 킬러문항이 공론화됐고, 수능을 둘러싼 여러 ‘반칙’들도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일부 교사들이 사교육 업체에 킬러문항을 만들어주고 돈을 받아온 행태 같은 것 말입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수사나 조사가 진행된 적은 없었죠. 국가 기관들이 팔을 걷어붙였으니 누군가는 처벌받고 방지 대책도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능은 괜찮은 걸까요.

수능은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SAT를 본 떠 설계되기 시작해 여러 차례 테스트를 거쳐 1993년부터 시행됐습니다. 1993년 당시 출생아 수는 71만5826명이었습니다. 그해 수능 응시자는 72만6634명이었습니다. 이후 n수생 유입으로 2000년까지 수능 응시자는 85만명 안팎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수능은 매년 70만명이 태어나고 대입에 80만명 이상 도전하던 시기 도입된 시험인 것입니다.

30여년이 흐른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지난해 태어난 아이는 24만9000명입니다(통계청 잠정). 출생아 수가 3분의 1 토막 났죠. 대학 진학률이 통상 70%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는 n수생을 넉넉하게 잡아도 응시자가 20만명대 초반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올해 수능 응시자 가운데 고3 재학생은 30만명대고, n수생을 합쳐도 40만명대 후반으로 예상됩니다.

수능은 등급과 표준점수, 백분위 점수로 수험생을 서열화하는 도구입니다. 5지 선다형으로 기계적으로 줄을 세우기 위해 고안됐습니다(수학 일부는 단답형). 대입 수험생이 80만명을 훌쩍 넘기던 시절엔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출생아 수와 대입 수험생이 20만명대로 쪼그라든 상황에서 학생을 정교하게 줄 세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비유가 가능해 보입니다. 대대로 자녀를 3~4명 낳던 집안이 있습니다. 이들 중 선발된 똑똑한 1명에게 가문의 자원을 밀어주는 게 집안 내력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집안에서 아이는 대대로 1명밖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렇다면 선발이 아닌 양성에 힘을 쓰는 게 집안의 미래를 위해 상식적인 결정일 겁니다.

5지 선다형 시험은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출제자가 설계한 틀 안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학교 정기고사부터 수능 준비에 이르기까지 출제 의도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훈련을 학창시절 내내 반복합니다. 짧은 시간에 정해진 문항을 풀어야 고득점을 받는 시험에서 출제 의도와 다른 독특한 생각은 장애물일 뿐입니다. 머리 좋은 아이들일수록 독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웁니다. 공교육은 이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인재는 적어도 출제자의 생각 속에서 정해진 답을 잘 찾도록 훈련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직업 세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오고 있죠. 해외 석학이나 미래학자들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주변에서 목도할 수 있습니다. 육체노동은 로봇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지식 노동의 경우 인공지능을 잘 다루거나, 인공지능이 넘보기 어려운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는 게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미래를 준비하려면 공교육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소질과 적성, 진로를 찾아주는 서비스로 탈바꿈될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의 성장 과정을 잘 아는 학부모, 교과 지식은 물론 해당 연령 아이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는 교사가 협력하는 공간이어야 하죠. 학교와 교육 당국은 학부모와 교사가 필요하다면 외부 전문가와 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학생에게 몰입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주는 전문가 시스템으로 변신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분야를 찾아주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몰두하는 분야가 있는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일탈 가능성이 작습니다. 일탈하더라도 자신의 자리로 복귀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학교에서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분야를 찾지는 못할 겁니다. 재능을 늦게 발현하거나 더러는 학창시절 아예 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교 3년을 합친 12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많은 아이들이 다양한 도전을 해보고 여러 분야를 맛볼 충분한 시간입니다. 이 과정에서 5지 선다형 시험의 역할은 크지 않을 겁니다.

교육부가 이달 중으로 2028학년도부터 적용할 새 대입제도 초안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수능의 영향력을 크게 줄이긴 어려울 듯합니다. 서울 주요 대학들이 신입생 절반가량을 수능 점수대로 뽑는 상황에서 큰 변화는 입시 현장에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입시 사교육 시장이 더 커질 우려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내년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정책 결정권자들이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5지 선다형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해 보입니다. 미래는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데 말이죠.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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