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파트 대량 공급 정책 되돌아봐야 할 때
LH 발주 아파트 91개 단지 중 무려 15개 단지에서 철근 누락이 확인됐다. 1970년대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사회적 규범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에 부실의 대명사였던 ‘철근 빼먹기’가 50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적 문제가 됐다니 개탄스럽다.
그동안 크고 작은 건설 관련 사고가 터질 때마다 처벌과 함께 새로운 제도와 안전장치들이 생겼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독특한 한국형 건설시장이 형성됐다.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아파트 경기 사이클’이 만들어졌다. 서민의 주거 안정을 목적으로 도입되고 보급된 대량공급 주거 시스템인 아파트로 인한 경기 사이클이다. 20세기 초반 대량공급, 표준화, 삶의 질 개선 등 여러 이유로 프랑스에서 1952년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가 디자인한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 형식의 아파트가 한국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하지만 명암이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의 주범이면서 부실 건설이란 악명이 늘 따라다녔다. 이번 철근 누락 사건은 우리 사회에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절박한 시그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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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주도의 한국형 건설 시장
경기에 민감해 숙련 기능공 유출
철근 누락 등 부실 공사로 이어져
」
어느 나라든 건설 일선에는 숙련된 기능공이 있다. 미장공·배선공·철근공 등으로 불리는 이들의 경험과 노하우는 매우 중요하다. 각자 자기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조합과 협동으로 움직인다. 예를 들면 방수공사를 할 때는 먼지 하나라도 없애기 위해 진공청소기로 바탕 바닥 면을 청소하면서 미장공이나 배선공과 협의하며 꼼꼼하게 정리하고 작업한다. 철근공도 배근하는 과정에서 형틀 목수와 소통하고 배선공과 대화하면서 작업한다. 건설은 이런 협력의 과정이 무수히 많다. 다양한 돌발 변수에 경험으로 대처하는 노하우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숙련 기능공들이 건설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직의 원인 중에 급등락하는 아파트 경기가 한몫한다. 경기가 좋아지면 일시적으로 늘어난 현장에 급조된 경력의 기능공들이 투입되고, 경기가 추락하면 숙련·비숙련 가릴 것 없이 실직으로 내몰린다. 그러다 보니 숙련 기능공들은 전직하거나 유사 업종으로 이직한다. 예컨대 건설과 유사한 인테리어 시장만 하더라도 인건비를 몇 배나 받는다. 인테리어 숙련 목수의 실질적인 시장 인건비는 하루 약 28만원이다. 게다가 철저한 주간 근무다. 반장급은 35만원 선이고, 만약 야간까지 일하면 50만~60만원을 받는다. 백화점처럼 밤샘 작업하는 경우는 100만원을 넘는다. 이런 시장을 두고 숙련 기능공들이 급여가 낮은 아파트 건설시장으로 가지 않는다.
대량으로 공급되는 아파트 사업은 박리다매 현장이다. 의외라 생각하겠지만 일반 건축·건설 현장과 비교하면 아파트는 평당가가 낮다.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건설사들은 원가 절감과 경비 절감에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작업자 3~4명 당 감독관이 1명 정도 배치된다. 반면 한국은 작업자 몇십명 당 1명 정도 배치된다. 한국에서 말하는 감리의 정의와 내용도 외국과는 다르다. 인건비가 다소 저렴한 중국이나 동남아 일부를 제외하고 한국처럼 대량 공급으로 일시에 건설되는 나라는 없다.
출렁이는 아파트 경기는 숙련된 기술자의 안정된 공급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웃 일본은 단독주택 신축과 증·개축이 연간 평균 100만 호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예측 가능성은 기술자들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하게 해주는 환경이다. 서구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보(梁)가 없는 ‘무량판’ 건물의 ‘전단 보강근 누락’이라는 황당한 사건은 분명히 철저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 배경과 원인을 고민하지 않으면 유사한 사례는 계속 나올 것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하나가 터져서 처벌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질 것이다. 그때마다 처벌로 해결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노동 공급 환경이 급변하고 사회 안전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대량 공급식 아파트 정책이 과연 유효한지 고민해야 한다. 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프랑스 파리는 도심에 대량 공급식 단지형 아파트를 허가하지 않는다. 덕분에 다양하고 매력적이고 놀라운 형태의 중고층 주거 건축이 즐비하다. 부러울 따름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성용 NCS Lab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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