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기형도의 ‘나리 나리 개나리’
우리는 어떨 때 ‘시적이다’라는 표현을 쓸까. ‘서정적 순간’을 빗댄 표현으로 많은 이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 빗댐이야말로 시를 평면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나쁜 습관 같다고 생각한다. 시의 끝 모를 욕망을 그렇게 요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우리의 기대보다 더 요란하게 꿈틀대며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서정성으로 우리에게 강렬한 각인을 남긴 시인 기형도가 특히 그러했다. 그는 일상의 장면을 윤색하지 않았다. 그가 탐지한 비극의 더께 자체를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식에 그는 골몰했다.
기형도의 시 ‘나리 나리 개나리’의 3연.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비극이 쌓이고 쌓여 시인의 고유한 세계관이 열렬하게 구축되는 순간 같다. 더 이상의 사유는 불가능할 것 같은 뜨거움이 있다.
그리고 그다음 행으로는 ‘나리 나리 개나리’라고 전혀 다른 맥락의 언어가 돌연 출현한다. 묵직한 의미망이 일순간 사라져버린다. 맥락을 져버리는 문장의 느닷없는 출현은 그러나 괴이하게도 시가 누적해 온 온갖 비극과 부정을 져버리지 않는다. 뜻의 무게는 더 묵직해지만, 뜻의 무게가 더 홀가분해지게 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마치 지렛대를 써서 들어 올리는 힘 같달까.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한 행은 이렇게 무의미로써 더 큰 힘이 솟아난다. 이 시에서 가장 ‘시적인 순간’이 이렇게 얻어졌다.
시는 이렇게 하고자 하는 말마저 벗어나기 위하여 뜻 모를 작동을 한다. 말의 의미에 더 이상 복무하지 않고 이탈하고자 한다. 이탈의 타이밍을 시는 잘 알고 있다. 말이 의미를 져버리고 소리만 남았을 때의 힘을 시인은 믿는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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