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멀어져 가는 제주 자유도시의 꿈
5년 가까이 복잡한 미로를 돌고 돌아온 결과는 막다른 길이었다. 치열한 소송전이 벌어졌지만 끝내 규제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했다. 국내 투자개방형 병원(영리병원) 1호로 사업을 추진했다가 최종 무산된 제주 녹지국제병원이다. 법원이 제주도의 손을 들어주고 병원 측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의료기관 허가 취소가 확정됐다.
이번 일은 단순히 병원 한 곳이 문을 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라산 중산간에 초대형 의료관광 복합단지를 조성하는 국책사업(제주 헬스케어타운)의 성패도 달려 있다. 헬스케어타운의 부지 면적(154만㎡)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절반이 넘는다. 현실적으로 병원이 없는 의료관광 단지는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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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때 규제 풀었던 투자병원
5년간 소송전 끝에 최종 무산돼
헬스케어타운 국책사업도 타격
」
혹시 보수 성향 정부가 ‘의료민영화’를 위해 투자병원을 밀어붙였던 것으로 생각한다면 심각한 오해다. 사실 제주도에 투자병원을 세울 수 있게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건 노무현 정부였다. 정부는 2005년 11월 제주도에 한해 투자병원을 허용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도 진료할 수 있게 규제를 푸는 내용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직접 나섰다. 그는 임기 4년째인 2006년 1월 신년연설에서 “의료서비스는 고급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분야”라며 “필요하면 과감하게 개방하고 서로 경쟁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는 2006년 2월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왜 하필 제주도였을까. 제주도에서 획기적으로 규제를 풀어 ‘홍콩식 국제자유도시’를 조성한다는 역대 정부의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투자병원은 제주도에서 규제개혁과 외국인 투자유치 전략의 중요한 일부다. 외국인 투자자를 머물게 하는 데 병원이나 학교는 꼭 필요한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홍콩식 국제자유도시 구상은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의원 전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 원장의 증언이 흥미롭다. 그는 제주도 남서쪽 화순항 일원에 ‘국제자유지역’(1983만4800㎡, 약 600만 평)을 조성해 홍콩을 떠나려는 해외 은행을 유치하려 했다고 소개했다. 제주 국제자유지역에는 공산권의 진출도 허용한다는 구상을 담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로선 파격적인 내용이다. 제주도가 1983년 9월에 작성한 보고서도 남아 있다. 제목은 ‘특정지역 제주도 종합개발계획 제3편 국제자유지역(항) 조성계획’이다. 예전엔 대외비 자료였지만 현재 국토연구원 전자도서관에서 일반 열람이 가능하다.
김 전 원장은 자신의 회고록(『남기고 싶은 국토개발 이야기』)에 이렇게 적었다.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는 제주 자유화 지역에 북한까지 들어와도 좋다고 한 상황이었고 전두환 대통령도 흔쾌히 좋다고 했다.” 하지만 제주 자유화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김 전 원장은 당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반대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제주 자유화 계획을 철회하면서 홍콩의 은행들은 결국 일본 도쿄로 지점을 옮겼다. 나는 지금까지도 김재익 경제수석이 제주 국제 자유화 계획을 왜 반대했는지 모른다”며 아쉬워했다.
이렇게 멈춰선 제주 자유화 계획을 부활시킨 건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정부는 1999년 12월 제주 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제주도가 헬스케어타운을 국제자유도시의 핵심 프로젝트로 선정한 건 2006년 12월이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헬스케어타운 사업은 투자병원 허가를 둘러싼 논란으로 결정적인 고비를 맞았다. 제주도는 2018년 12월 녹지병원 개설 허가를 내줬다. 외국인 환자만 볼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녹지병원은 이런 조건에 반발해 법정 기한(3개월) 안에 병원 문을 열지 않았다. 결국 제주도는 병원 허가를 취소했고 녹지병원은 법원에 소송을 냈다. 소송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헬스케어타운 부지의 상당 부분은 사실상 폐허로 방치됐다. 최대 투자자인 중국 녹지그룹이 공사를 전면 중단했기 때문이다. 제주도로선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아예 헬스케어타운 사업을 접을 게 아니라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 다른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병원 하나 마음대로 세울 수 없는 곳에 외국인이 신뢰를 갖고 거액을 투자할 리 없다. 그렇다면 국내 자본 유치로 외국인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울 수 있을까. 수도권처럼 인구 밀집 지역이 아닌 점을 고려하면 현실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현재로선 대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글=주정완 논설위원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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