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악역 만난 이병헌 "아파트 뭔데 이렇게 집착할까…인간에 대한 이야기죠"

나원정 2023. 8. 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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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개봉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연 이병헌 "만화적 재난설정에
많은 것 담아…악역 아닌 사람 이야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피식 웃게 되는 블랙코미디인데 이상하게 긴장감은 커지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자 정서"라고 말했다. 사진 BH엔터테인먼트

“지진으로 모든 게 무너졌는데 우리 아파트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게 재밌었어요. 만화적 설정인데 그 안에 많은 것이 일어날 것 같았죠.”
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병헌(53)의 미소에서 만족감이 묻어났다. 주연을 맡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9일 개봉)의 언론 시사에서 허구의 재난 상황인데도 실감 난다는 평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웹툰 ‘유쾌한 왕따’가 토대인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김영탁은 황궁아파트에서 외부인들을 몰아내는 입주민 대표로, 원작과 가장 달라진 캐릭터다. 웹툰에선 군대식 서열의식‧마초성을 지닌 악인이던 영탁을 이병헌이 선악의 경계에 올려놨다. 그의 '인생 악역'이란 호평이다.

‘가려진 시간’(2016)에서 시간이 정지된 차원에 갇힌 이들의 재난을 그린 엄태화 감독이 공동각본‧연출을 겸했다. “웹툰에선 아파트에 ‘시스템’이 갖춰지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아서 궁금했다”며 “극한상황에 처하면 사람들은 어려운 선택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지 않을까. 영탁이 등 떠밀리듯 그런 자리에 올라가 점점 바뀌는 상황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엄 감독에게 이병헌은 전략적 무기였다.


오겜·우블…못 봤던 이병헌의 기이한 변주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재난 드라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의 액체금속 살인병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에서 살인지령을 내리는 프론트맨 등 코믹스에서 걸어나온 듯한 캐릭터가 됐다가도, 제주 토박이를 연기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2022)에선 더없이 인간적인 얼굴을 보여준 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영탁에선 그간 본 적 없는 이병헌의 모습을 보게 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 2018)에서 연기한 미군 장교 유진 초이의 수줍은 미소, 어수룩한 해맑음을 기이하게 변주했다.

“블랙코미디가 신선했다”고 운을 뗀 이병헌은 “이 영화에 상식적인 선 안에서 선악이 공존하는 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 이타적인 사람들도 있고 각자 선악의 적정선이 다르잖아요.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보이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가 재밌었죠.”


"피식 웃는데 이상하게 긴장감 커져"


확성기 켜는 것조차 서툴던 영탁은 아파트 일이라면 이마가 깨져도, 화염 속이라도 덤벼든다. “다 됐고 우리 주민들, 내 가족들은 절대로 지키자”며 어금니를 꽉 문 그의 말투는 얼핏 우스꽝스럽지만, 긴장감이 감돈다.

이병헌은 “피식 웃게 되는 블랙코미디가 있지만, 이상하게 긴장감은 커지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자 정서였다”고 했다. “도대체 아파트가 뭔데 이렇게까지 집착할까.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아파트가, 내 집 마련이란 꿈이 오래 이어져 온 문화잖아요.”

이병헌은 영탁의 기행을 “재해로 모든 걸 잃고 살아있는 이유조차 못 느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세상이 리셋된 걸 깨달으며 뭔가 바뀐 듯한 느낌”에서 찾았다. “얼떨결에 완장을 차고 내 아파트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해보자는 책임감을 느끼고, 나름 맞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가면서 느낀 권력의 맛이 기형적인 형태로 커져 가는데 정작 자신은 모른다고 봤다”면서다.


"악역, 선역보다 '사람' 그렸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 현장 모습. 여름에 촬영이 진행된터다. 이병헌은 "폭염의 날씨에 한겨울옷을 입고 촬영하는 게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는 그 인물이 처한 상황, 캐릭터에 끊임없이 다가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는 영탁의 우울함, 무력감, 상실감, 분노 등을 촬영 내내 붙들고 살았다고 했다. 바깥 세상에서 찾아온 혜원(박지후)에게 극 후반 돌발 행동을 하는 장면도 “처음 시나리오 읽을 땐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했다”는 그는 “말도 못 할 만큼 분노하고 물불 안 가리는 감정 상태를 연기로 쌓아 올려” 관객을 기어코 설득시킨다. 배우에게 연기 지시를 거의 하지 않는 엄 감독 스타일에 맞춰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촬영 쉴 때 식구들과 3~4일 놀고 웃을 때도 마음 한구석에 영탁이 있었죠.”

호러 옴니버스 ‘쓰리, 몬스터’(2004) 속 단편 ‘컷’에서 극한 상황에 놓인 영화감독의 섬뜩한 변신으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선 다혈질의 폭력단 두목 박창이로 악역을 선보인 그다. “어느 순간부터 악역, 선한 역보다 ‘사람’을 그렸다”고 이병헌은 돌이켰다.

“영탁도 굳이 따지면 악역에 가깝지만 사정이 있고 사연이 있죠. 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재난영화 같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관객 전달 될까, 15년 전 긴장감 여전"


다음에 그를 만날 작품은 ‘오징어 게임’ 시즌2다. “연기 호평에 대한 부담감이요? 15년 전 같은 질문을 받고 막연히 ‘어느 정도의 연기자가 돼야 그런 부담이 없어질까’ 생각했는데, 막상 지금도 똑같아요.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감정에 솔직하게 연기했는데 관객에게 전달이 안 되면 어쩌지 하는 긴장감은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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