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지운 곳, 내일을 그리다

손영옥 2023. 8. 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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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장애 예술 현장을 가다] <하> 비영리 스튜디오 ‘인투아트’
영국 런던 페컴에 위치한 신경다양성 예술가 창작 스튜디오 ‘인투아트’ 입주 작가 우두에히 이미엔완린이 지난 6월 자신이 좋아하는 록 스타를 표현주의 기법으로 그린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장애 작가들에게 회화, 패션, 도자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 창작 지원을 하고 이를 활용해 벽지·의류 등 아트 상품화를 위한 시도도 활발히 하고 있다. 런던=손영옥 문화전문기자


영국의 신경다양성(발달장애) 예술가 창작 스튜디오인 ‘인투아트’는 런던 남부 페컴 지역의 한 주차장을 개조한 공공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페컴은 서울의 성수동처럼 도시재생을 통해 예술과 문화가 심어지며 청춘들이 모여드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2000년 예술을 전공한 엘라 리치에와 샘 존스가 공동 설립한 인투아트는 6년 전 지금 자리로 이사 왔다. 지난 20여년의 열정적인 활약사는 인투아트 공동 대표 중 한 명인 리치에 대표가 지난해 영국 여왕이 수여하는 훈장(MBE)를 받았다는 데서 충분히 상상이 간다.

지난 6월 하순 영국 출장을 가 이곳을 찾았다. 리치에 대표는 “공교롭게도 전시를 앞두고 있어 입주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들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게 됐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의 말대로 창고에는 캔버스가 포장된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쪽 행거에는 작가들의 작품이 디자인된 의류가 비닐 커버에 담겨 걸려 있었다. 소속 작가들은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 페컴의 한 갤러리에서 여는 전시를 앞두고 있었다.

인투아트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대부분 신경다양성(발달 장애)으로 지칭되는 자폐, 지체 장애 등을 겪고 있다. 인투아트는 성격이 이들 작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스튜디오 역할을 하면서 영국의 학제에서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요구되는 파운데이션(대학 예비) 과정도 인가받아야 한다. 두 공동대표가 기성 미술 작가들인 다른 교사들과 함께 순수예술, 디자인, 도자 공예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소속 작가들을 지도한다. 도자 작업실에 이어 회화 작업실에 들렀더니 마침 기성 작가들의 지도 아래 3명의 학생이 협업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른 요일에는 8명 정도가 수업을 하지만 수요일만은 학생 수가 이렇게 적다. 왜냐고 물었더니 “장애 정도에 따라 수업 환경에 대한 필요가 다르다. 이들에게는 조용하면서도 넓은 공간이 필요해 수업 받는 학생 숫자가 적다”는 답이 돌아왔다.

30대 초반의 우두에히 이미엔완린은 자신이 좋아하는 록 스타 등 인물의 초상화를 색이 번지는 표현주의 기법으로 그린다. 현장에서 만난 그는 꽤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참조한 초상 사진과 자신의 회화 작품을 나란히 세우고 포즈를 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올 들어 기성 작가들과 함께 하는 기획전에 초대받았다.

작업실에는 인투아트에서 활동하는 작가 개개인의 아카이브가 서랍 등에 잘 정돈된 게 눈에 들어왔다. 이날은 만날 수 없었지만, 패션 디자인을 하는 여성 작가 은텐제 에노-아무콰예의 의상 드로잉도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에노-아무콰예는 영국예술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2019년 패션쇼를 한 적이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한데 이어 영국 유수의 자선단체인 폴햄린재단이 주는 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영화도 제작하는 등 행보에 거침이 없다. 짧은 다큐멘터리 영화지만 자신의 퍼포먼스를 촬영하고 편집하는 등 전문가의 기술적인 도움을 받아 감독 데뷔까지 한 것이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으로 만든 의류(위쪽)와 벽지 등을 소개하며 각각 포즈를 취한 모습. 인투아트 제공


리치에 대표는 작가들의 작업이 벽지와 러그로 제작되거나 맨투맨, 잠옷, 원피스 등 의류의 디자인으로 쓰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우리는 작가들에게 뭘 하라고 제시하지 않아요. 스스로 원하는 걸 찾고 방향을 잡아가도록 도울 뿐이지요. 리서치를 해서 미술 장르나 소재 등 본인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합니다. 작업을 하다보면 작가들의 열정이 커지며 전시도 나가게 되고 그러더라고요.”

장애 작가들을 도와 협업하는 기성 작가들도 회화, 사진, 텍스타일, 도자기, 영화 제작, 패션, 북 디자인, 웹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등 분야가 다양하다. 한국의 발달장애 작가들의 작품 활동이 회화에 한정된 것과 달리 다양성 측면에서 영국 장애예술은 진일보해 부러웠다.

이곳은 작품을 원화로도 팔지만 판화로 제작해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등에 나가 판매도 한다. 리치에 대표는 “우리는 동정심을 사서 작품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나 작품성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인투아트는 연간 예산 30만 파운드(약 6억원) 중 절반은 영국예술위원회의 후원을 받는다.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협찬과 후원을 받아 조달한다. 재정 자립을 위해 지난해 디자인스튜디오도 설립했다. 매출은 초기 단계라 연 1만 파운드(약 1666만원)에 머물며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다. 유명 패션 스튜디오 래번과 협업해 의류를 제작한 것도 그런 재정 자립의 일환이다.

인투아트를 설립한 공동대표 엘라 리치에(왼쪽)와 샘 존스. 런던=손영옥 문화전문기자


리치에 대표는 어쩌다 장애인을 위한 비영리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됐을까.

“샘과 나는 세인트마틴 아트스쿨에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2학년 여름에 발달장애 청소년 예술캠프에 자원봉사를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장애청소년들에게 지급되는 미술재료가 좋지 않은 걸 보고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그들도 또래의 비장애인과 동등한 예술적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누군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졸업 후 교사로 잠시 일하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2000년 영국예술위원회의 기금 2000파운드를 따내 인투아트 프로젝트의 첫발을 내딛었다. 현재 22∼24명의 상주 작가가 있고 이중 5명이 대입용 파운데이션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소문이 나면서 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작가를 선발할 때는 제도적 지원을 받기 힘든 여건에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구체적인 예를 물었더니 “청소년들의 경우 학습장애가 있을 때 학교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 돼 갑자기 그런 증세가 나타나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환경이 별로 없지 않냐”고 답했다.

그는 주중 대부분을 인투아트의 관리자로 일하지만 금요일에는 자신도 오롯이 작가로 산다. 그는 “미술 공간의 관리자인 디렉터와 미술 현장의 갭이 크다. 그 갭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현장과 가까워야 한다. 작품 활동을 해야 현장의 목소리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아트 상품화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현대미술에서 자폐 등 장애가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갤러리에 전시되고 판매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도 내셔널갤러리 등에서 커미션을 받아서 전시를 하긴 했지만 아주 일부 작가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가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지만 전통적인 미술 유통 방식으로는 쉽지가 않습니다. 또 어떤 장애 작가는 개인전이 꿈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장애 작가는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넣어 많이 파는 게 꿈일 수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트 상품 개발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이토록 다양하게 활동하는 인투아트의 광폭 행보는 런던 사회에도 소문이 나면서 인투아트 작가들이 패션잡지 보그의 영국판 2023년 5월호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표지 속 이들 장애 작가의 표정이 행복하고 당당해 보였다.

런던=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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