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랑이 들킬까 겁나는 소녀, 그 이유는?
[조영준 기자]
▲ 영화 <지루박>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서로 지지하며 걸어 나간다.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지나고 보니 누군가의 어깨가 든든했던 기억으로 남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끝내 그 사려 깊은 마음과 따뜻한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상황들은 보편적인 쪽에 속한다. 때로는 이기적인 마음이 앞서 그 고마움을 알면서도 끝내 외면하거나 그 대상을 나쁘게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도움으로 인해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을 우려하거나 체면이 깎이게 될 것이라 여기는 경우다.
하민(이현정 분)과 재희(사위민 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적어도 학교 밖에서는 그렇다. 친구들에게 서로에게 느끼는 깊은 감정을 말하지는 못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 관계가 조금 더 단단해질 때까지 유예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두 사람에게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다. 하민과 재희 커플이 양쪽 모두 여자라는 사실이다. 학교에 서로가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함께 등교를 하다가도 교문이 보이기 시작하면 맞잡은 손을 놓는 두 사람이다.
영화 <지루박>은 자신들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두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결코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수도 없는 이 감정을 중심에 놓고 영화는 하민과 재희가 이에 대처하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중요한 것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방식에 대한 것인데, 영화는 어느 쪽도 쉽게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비록 두 사람은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외부적 압력과 폭력에 조금 다른 반응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02.
문제는 이 밀회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감추고자 하는 쪽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하민이다. 그녀는 소문이 퍼지게 될 경우 자신이 잃게 될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전교회장선거는 물론 최근 성적까지 올라 교장선생님의 고등학교 진학 추천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까지, 재희와의 만남만 아니라면 모범생의 이미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상황이다. 선거에 러닝메이트로 함께 나가기로 한 혜림(송채빈 분)과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희가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학교에 돌기 시작하면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하민은 심지어 그 모습을 모른 척한다.
▲ 영화 <지루박>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이런 걸 왜 만들어. 그냥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니가 자꾸 티 나게 구니까 애들이 나까지 이상하게 보잖아."
혜림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 난 이후에는 그 갈등이 더 극심해진다. 이제 하민에게 재희는 감추어야 할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학교 생활 가운데 선택을 강요받는 존재로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순수함 마음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선거를 돕고 싶어 하는 재희의 마음 앞에서도 냉정하고 못되게 구는 이유는 그 마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의 교류를 외부에 들키게 될 경우 자신마저 낮은 곳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어서다. 어쩌면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으로 피해를 입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는 밝히지 않는 재희를 하민은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희라는 인물의 위치를 극의 가장 아래에 위치시킨다. 그녀의 처지를 비참하고 나쁘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재희의 탓이라거나 잘못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자 하고, 또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하민에게 잠깐 서운해하기는 하지만 그런 정도의 여린 마음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04.
이 영화의 한 축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하민과 재희의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하민의 할머니가 만드는 이야기 속에 있다. 치매에 걸린 하민의 할머니는 매일 아침 어디론가 향해 집을 나가버린다. 이로 인해 하민의 가족은 누군가가 항상 집에 남아 그를 감시해야 하는 예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어느 날, 하민은 하굣길에 집을 나선 할머니를 발견하고 몰래 뒤를 따르다 오래되고 허름한 콜라텍에서 이름 모를 할아버지와 지루박을 추고 있는 할머니를 발견하게 된다. 콜라텍 주인의 말로는 젊은 시절 할머니가 지루박 하나는 끝내주게 잘 춰서 함께 추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아침마다 집을 나섰던 것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무언가를 드러내는 행위였던 셈이다.
▲ 영화 <지루박> 스틸컷 |
ⓒ 인디그라운 |
05.
내내 미숙한 감정을 지켜보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성장의 문법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변모시킨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과 감정을 배반하던 모습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의 성장이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할머니의 지루박'이 있다.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향의 삶은 먼 훗날 기억을 잃은 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외부의 무엇도 자신을 부술 수 없다는 것을 할머니의 삶이 직접 가르쳐준 셈이다.
이제 두 사람은 손을 붙잡고 교문을 뛰쳐나간다. 여전히 그 사랑은 무겁고 여릴 것이고 외부의 상황은 현재의 다짐보다 언제나 어려울 테지만, 무엇을 지켜야 하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처음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내일은 조금 더 단단하고 따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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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세 번째 큐레이션 ‘일대일의 관계’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8월 15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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