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족한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런 기적이라니...
[안치용 기자]
▲ [영화평: 콘크리트 유토피아] ⓒ 안치용 |
*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완벽하게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가상의 '황궁' 아파트와 아파트 주민, 이 아파트로 모여드는 다른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극중 시점은 겨울. 강추위가 덮쳐 외부인이 이 아파트를 찾아오고, 아파트가 점차 포화상태로 치닫자 외부인을 차단하고 배타적인 주민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황궁 아파트는 파괴된 세상에서 유일한 아파트이자 과거 문법으로 가장 좋은 '아파트'가 된다. 대재앙과 함께 도래한 종말의 시대에 그곳은 노아의 방주이자 '콘크리트 유토피아'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노아의 방주는 계획한 것이었지만 황궁 아파트는 우연한 '축복'이다. 결말을 보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맞아들어간다. 유토피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곳을 뜻하니 말이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재난과 함께 시작하기에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얼핏 재난영화처럼 느껴진다. 재난영화 하면 <샌 안드레아스>(2015년)나 <얼라이브>(1993년) 같은 영화가 쉽게 떠오른다. 특히 <샌 안드레아스>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동일하게 대지진 이후 상황을 그렸다. 두 영화는 지진 말고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듯하다. <샌 안드레아스>와 <얼라이브>를 종합했다고 하면 억지로 수긍할 수 있겠다만, 영리한 관객이라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할 것이다.
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관객은 이질감을 느끼게 될까. 재난영화라고 할 때의 그 재난은 지진, 쓰나미, 홍수 등 자연재난과 화재, 붕괴, 폭발 등 사회재난으로 법률상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주지하듯 초고층 건물의 화재나 비행기 추락처럼 인류문명의 산물과 관련한 재난이 종종 영화 소재로 활용된다. 일단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을 소재로 했으니 재난영화 범주에 들어야 할까.
엄태화 감독은 "대지진 속에서 아파트 한 채만 무너지지 않고 남았다는 설정을 관객들이 믿을 수 있도록 리얼함에 가장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엄 감독이 말한 '설정'에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김숭늉 작가의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이다. 웹툰 혹은 만화가 원작이라는 뜻으로 영화의 설정이 만화적이다. 만화적 설정이라는 게 꼭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았겠지만, 만화적 설정이라는 말 자체로 리얼리즘과 거리가 느껴진다. 게다가 대지진 속에서 아파트 한 채만 무너지지 않고 남았다는 '설정'이 선입견을 확증한다.
전면적인 파괴를 초래한 상상을 불허할 대지진 속에서 무너지지 않은 건물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 혹은 범위를 줄여 서울에서 그 많은 아파트 중에서 단 한 동만 남은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이 설정을 관객이 '리얼함'으로 믿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서부터 스텝이 꼬였다.
영화는 만화만큼이나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곳이기에 엄 감독이 말한 '설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상상을 관객과 제작진이 공통분모로 받아들이며 영화를 전개하는 '상상의 리얼리즘'이 좋은 영화에서 종종 목격된다. '상상의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상상력과는 다르다. 보통 재난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전자에 가깝다.
리바이어던의 공포
▲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콘크리트 유토피아> 기저에는 흔히 말하는 '아파트 사회학'이 깔려 있다. 아파트 주민이 아닌 영탁(이병헌)이 주민 대표가 된 것을 비롯해 곳곳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아파트 사회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분포한다. 현실의 관객에게 그런 인식을 작동시켜놓고 영화는 그런 인식을 무화한 그 '설정'으로 돌입한다. 기존 질서와 공권력이 무력화하고 극중 대사처럼 전면 '리셋'이 일어난다.
주변부 인생에 불과한 영탁이 주민 대표가 된 다음 서서히 권력에 익숙해지며 지배자 비슷한 어떤 불편한 존재로 바뀌는 모습이 영화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최초의 인간'을 설정하기를 좋아했다. 그 모델에서 리바이어던이 나왔고 사회계약 사상이 출현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설정은 재난영화보다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최초의 인간'과 더 닮았다.
만인 대 만인이 투쟁하는 가운데 불가피하게 개인의 폭력을 흔히 공권력이라고 하는 리바이어던에 양도한다는 토마스 홉스의 사상을 단순화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된다. 미증유의 재난에서 피어난 인간애가 보통 재난영화의 핵심이라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사회사상을 우화로 표현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재난은 대체로 미증유이다.
휴머니즘이란 상투성에 집중했으면
▲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극중에서 영탁을 축으로 전형적인 캐릭터를 배치하여 인간군상의 현실태를 공감을 끌어내며 잘 보여준다. 영탁은 영화 초반 아파트에 발생한 화재를 순식간에 해결하며 존재감을 드러내 황궁 아파트 주민 대표로 벼락출세한 인물이다. 추진력과 희생정신으로 모두의 신뢰를 얻으며 점차 공고한 권력을 쥐게 되는 영탁은 이후 영화의 흐름을 쥐락펴락한다.
영탁의 대척점에 선 캐릭터인 명화(박보영)는 영화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담당한다. 명화의 남편 민성(박서준)은 영탁과 명화 중간쯤의 캐릭터로 그려진다. 부녀회장 금애(김선영), 외부에서 아파트로 귀환한 혜원(박지후), 소극적 저항주의자 도균(김도윤) 등 인간군상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캐릭터가 조화롭게 등장한다.
김 감독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모여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영화라고 자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배우들의 앙상블이 형성된 건 맞는 듯하다. 문제는 처음에 잘못 끼운 단추가 마지막에 사소하다면 사소한 곤란을 살짝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는 있을 법한 재난 및 그 재난을 감당한 휴머니즘과, 사회사상을 크로키로 그려낸 우화가 공존한다. 아파트 사회학도 그렇지만 사회사상은 재난의 휴머니즘과 합체하기가 더 어렵다. 있을 법한 재난을 리얼하게 그리면서 휴머니즘의 상투성을 흥미진진하게 투사했으면, 거기에 유머 수준으로 아파트 사회학을 고명으로 얹었으면 무난했을 텐데, 의도하지 않은 '최초의 인간' 우화가 되면서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가 발생했다.
영화 전체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서로 늑대인 상태(homo homini lupus)'이지만 명화의 클로즈업 눈물 이후 결말이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서로 우애로운 존재(homo homini amicus)'로 비약한다. 즉 늑대가 친구로 돌변한다. 일반 재난영화의 결말을 답습한 것은 우화를 만들면서 재난영화 문법을 따랐기 때문일 터이다. 어쩌면 우화를 만든다는 의식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볼 만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넣을 것을 넣고, 보여줄 것을 보여주며 충분히 채워 넣은 성실한 작품이다. 세계관을 틀어쥔 채 심오한 전언을 드러내며 재미까지 있는 영화일 수 있었는데… 그런 아쉬움을 빼면 충분히 볼 만한 영화이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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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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