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후쿠시마현과 한국을 대하는 시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지난 7월 14일 마유즈미 토모히코 도쿄전력 대변인이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앞에서 오염수 해양 방류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내각이 8월 하순이나 9월 중에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는 쪽으로 검토 중이라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한미일 정상회담과 어민단체 면담 일정을 감안한 결과라고 보도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배려하며 방류 시점을 저울질하는 듯하지만, 이것이 모양새에 불과하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후쿠시마현 어민을 배려하는 듯한 모양새도 연출하고 있으나, 이 역시 형식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가 800억 엔의 수산업 지원 기금을 약속해도 후쿠시마 어민들이 여전히 냉랭한 것은 정부의 진정성이 믿겨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현 주민들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방류 결정을 밀어붙이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오랜 차별과 무관치 않다. 일본 왕실이 700년 만에 권력를 되찾는 것을 후쿠시마현이 가장 격렬히 반대했던 역사를 떼어넣고 볼 수 없다.
일왕(천황)은 1945년 패전으로 실권을 잃었지만 여전히 국가원수 지위를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행 일본 헌법은 제1조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라고 한 뒤 제3조에서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고 규정했다.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일왕이 헌법상의 최고대권을 갖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의 700년 동안에는 일왕의 정부인 '조정'이 아니라 무신들의 정부인 '막부'가 일본을 이끌었다. 조선이나 중국이 승인한 '일본국왕'은 일왕이 아니라 막부 쇼군(將軍)이었다. 이런 구도를 깨고 일왕과 그 조정이 권력의 정점에 서도록 만든 것이 메이지유신이다. 이때 왕정복고가 이뤄졌기에 일왕은 1945년 패전 뒤에도 국가원수 지위를 국내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바로 그 왕정복고를 가장 격렬히 반대한 지역이 후쿠시마현을 비롯한 도호쿠(동북) 지역이다.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열도 서남쪽의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1867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복고시키자, 1868년 1월에 지금의 후쿠오카현 서부에 해당하는 아이즈번을 비롯해 오우에쓰열번동맹·쇼나이번 등이 일왕의 군대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무진년에 벌어진 이 전쟁은 무진(戊辰)의 일본어 발음인 '보신'을 따서 보신전쟁으로 불린다. 보신전쟁은 일왕의 군대가 열도 서남부에서 동북부로 진격하며 구세력을 일소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이 전쟁으로 인한 앙금은 패자인 후쿠오카현이 차별과 빈곤을 겪는 원인이 됐다. 후쿠시마현 출신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학 교수는 2013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에서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 일본인들이 이곳 주민들을 '도호쿠 토인(土人)'이나 '후쿠시마 토인'같은 멸칭으로 부르며 차별하는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메이지유신을 성립시킨 내전 즉 보신전쟁에서 아이즈·쇼나이번과 오우에쓰열번동맹이 관군에 패배한 이후 '백하이북 일산백문(白河以北 一山百文)'이라는 말로 상징돼온 차별 의식이다."
뿌리 깊은 후쿠시마 차별
후쿠시마현 남부에 한자 '백하'로 표기되는 시라카와라는 도시가 있다. 시라카와 이북에서는 산 하나가 100푼밖에 되지 않는다는 과장된 이 이야기는 보신전쟁 이후로 이 지역이 겪는 차별과 빈곤을 반영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고도성장의 결과 ··· 도호쿠도 예전과 같은 가난한 농촌 이미지로 거론되는 경우는 적어졌다"면서도 "그럼에도 일본인들 의식의 어딘가에 메이지유신 이래의 도호쿠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잠재돼 있었던 걸까"라는 말로 지금의 차별 문제를 언급했다.
지역 경제가 발달하면 차별이 더 개선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개선의 효과를 깎아내리는 시스템이 일본 사회에 존재한다. 총리대신이나 내각 각료들의 참배로 해마다 몇 번씩 국제적 논란을 일으키는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그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로 일왕을 위해 전사한 246만 명 이상이 제사를 받고 있다. 1875년 강화도 침공 때 사망한 2명, 1882년 임오군란 때 사망한 14명, 1884년 갑신정변 때 사망한 6명, 조선 등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사망한 1만 3619명, 조선 등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때 사망한 8만 8429명도 이 숫자에 포함된다.
합동 제사를 받는 전체 합사자 246만여 명 중에서 7751명은 보신전쟁에서 배출됐다. 합사자를 발생시킨 15건의 정변 혹은 전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게 보신전쟁이다. 메이지유신 직후에 벌어졌기 때문에 이 전쟁 전사자가 가장 먼저 합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신전쟁 전사자들 중에서 후쿠시마현 출신들은 합사돼 있지 않다. 일왕의 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당연히 합동 제사를 받지 못한다. 왕정복고를 방해한 세력이기 때문에 이들이 야스쿠니에 합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왕의 군대가 후쿠시마현을 진압한 사건을 기념하는 이런 의례 역시 '백산 이북'에 대한 차별을 공고히 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차별이 조장되는 게 아니라 신사 참배라는 종교적 형식마저 차별을 은연중에 합리화하고 있으므로, 후쿠시마현 차별은 쉽게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차별의 뿌리가 그처럼 깊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의 의사나 경제 활동을 무시하는 오염수 방류가 쉽게 강행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 지난 7월 20일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도쿄 경제산업성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 연합뉴스 |
실종사건 빈발과 연동되는 사회 현상이 '야반도주'나 '밤 이사'로 번역되는 요니게(夜逃げ)다. 장기미제로 남는 실종사건이 많은 것은 바로 이 야반도주나 밤 이사를 통한 자발적 실종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위 논문은 "일본에서는 이혼·실직·사채 등 사회적 실패를 겪은 사람들이 현재의 신분을 버리고 새 삶을 살기 위해 야반도주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한 뒤 "매년 발생하는 10만 명의 실종자 중 최소 약 8만 명은 바로 '자발적 실종'을 택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종사건 해결이 어려운 것은 그 대부분이 자발적 실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스로 증발된 사람들이 경찰에 발각되기 어려운 지역으로 숨어들기 때문이다. 그곳은 다름아닌 후쿠시마현이다. 위 논문 제2장의 소제목은 "사라진 증발자가 도달하는 곳, 후쿠시마"다.
후쿠시마현에서는 경찰의 통제를 벗어난 야쿠자들이 일용직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또 대중이 기피하는 원전 복구 사업도 이 지역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신원 불명자들이 안심하고 취업할 수 있는 지역이다.
위 논문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복구 사업은 워낙 고위험군의 절대 기피 대상인 탓에 노동력 수급이 어렵다 보니, 원전 복구사업 하청업체에서는 신원 불명자라 하더라도 묵인하고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실종자들이 후쿠시마로 몰려드는 이런 장면 역시 차별 및 빈곤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일본 정부가 오염수 해양 방류를 밀어부칠 수 있는 것은 그로 인한 최대 피해 지역이 후쿠시마현이라는 점과 떼어놓고 보기 힘들다. 1868년 보신전쟁 이래 차별과 빈곤을 겪고 야스쿠니신사 합사로 인해 그런 차별이 더욱 공고해지는 후쿠시마현이 일차적 피해 지역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는 측면도 있다.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는 "후쿠시마현은 일본의 쓰레기통"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후쿠시마현에 대한 차별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소연한다. 후쿠시마현이 그런 차별을 받는 곳이 아니라면 일본 정부가 지금처럼 강행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 방류의 일차적 피해자는 일본 안에서는 후쿠시마현이고 일본 밖에서는 한국이다. 일본 정부가 겉으로는 한국과 후쿠시마현을 신경 쓰는 듯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극심한 차별의 대상인 후쿠시마현과 더불어 한국이 이번 사안에 관련돼 있다는 점은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현을 대하는 시선과 일본 정부가 한국을 대하는 시선을 비교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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