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가 고향인 내가 본 '밀수' 명장면
[서부원 기자]
단지 '밀수'라는 제목에 끌려 아무 생각 없이 영화표를 끊었다. 대개 끊기 전 미리 본 이들이 남긴 관람평을 대충 훑어보곤 하는데, 이번엔 일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감독이 누군지, 어떤 배우들이 출연하는지에도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백지상태에서 영화 <밀수>를 관람했다.
밀수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끌린 이유는 있다. '밀수의 도시'로 악명 높았던 전남 여수에서 나고 자란 까닭이다. 어릴 적만 해도 주변에서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은 밀수가 가져온 호황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영화 속 시간적 배경이 70년대이니 여수에서 산 내 어린 시절과 정확히 겹친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와서 따져볼 순 없지만, 주변에서 일본제 라디오나 작은 가전제품들을 종종 볼 수 있었던 것도 밀수가 횡행했던 탓일 듯싶다. 그땐 국산 전자제품이 더 귀한 시절이었다.
당시 부두의 하역 노동자였던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던 밀수 관련 이야기도 어렴풋이 뇌리에 남아있다. 밀수가 공공연했던 건 그만큼 통관 절차가 허술했고 온갖 비리가 난무했다는 뜻일 테다. 여수엔 세관원들의 숫자도 많았을뿐더러 하나같이 형편이 넉넉했다고들 했다.
세관원들에게 '오찌'만 건네면 무사통과됐다는 말도 기억난다. 어원은 알 길 없지만, 아버지는 뇌물을 무조건 '오찌'라고 불렀다. 학부모가 자녀를 잘 부탁한다며 교사에게 건네는 촌지도 그렇게 통칭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 곳곳에 뇌물과 촌지를 주고받는 문화가 공공연했다.
▲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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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밀수에 대해 듣고 자라선지, 스크린이 환해지기도 전에 감독에 빙의되어 영화적 상상력이 발동됐다. 줄거리에 관한 예측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 분)가 작은 어촌마을 군천의 토박이 밀수꾼 장도리(박정민 분)에게 당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결말도 얼추 예상대로였다.
특히 탈세 운운하며 밀수를 단속하는 세관원 이장춘(김종수 분)이 밀수에 깊숙이 연관돼 있으리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릴 적 경험상 '오찌'가 빠지진 않을 거라고 여겨서다. 특정 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는 반전의 재미를 주는 익숙한 소재이기도 하다.
이장춘이 단속 경찰관에 슬며시 다가가 자신의 손목에서 롤렉스를 풀어 건네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내 머릿속 시나리오대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세관원이 밀수라는 범죄 행위의 방조자를 넘어 주모자였다는 설정은 적어도 내겐 반전이 아니었다.
러닝타임은 다 되어 가는데, '나쁜 놈'과 '더 나쁜 놈'만 남은 상황에서 그들을 응징할 주체가 사라졌다. 결국 밀수라는 먹이사슬 구조의 맨 아래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해녀들이 권선징악의 행동에 나서게 된다. 반전을 거듭한 영화의 종착역은 그렇듯 '나쁜 놈은 죽는다'는 뻔한 교훈이었다.
그래선지 영화의 맨 마지막 긴 '수중 결투' 장면은 왠지 사족 같았다. 영화 제작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걸 뽐내려는 듯한 감독의 의중이 읽혔다. 여느 영화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는 독특하고 신선한 장면이긴 하나, 현실성과는 사뭇 동떨어져 되레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삼척동자도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장면이어서, 언뜻 식상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느닷없이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해 식인 상어까지 등장시킨 건 너무 나갔다 싶다. 그렇게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은 일심단결한 해녀들에 의해 모두 바다에 내던져져 상어의 밥이 됐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 '나쁜 놈'들은 죄다 남자들이고, 해녀에서부터 다방 마담까지 여자들은 서로의 고통을 보듬고 연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해녀들의 의리파 리더인 진숙(염정아 분)은 휴머니스트의 표본이고, 다방 마담 옥분(고민시 분)까지 '나쁜 놈'들에 온몸으로 맞선다.
▲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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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친구들과 함께 봤다는 한 아이는 '페미니즘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해녀를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해도, 여자 배우의 비중이 압도적일뿐더러 성별로 선악이 확연히 갈린다며 의도된 설정이라고 단정했다. 아이의 말투엔 다소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묻어났다.
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려는 설정도 되레 몰입을 방해한다. 울긋불긋 촌티 나는 배우들의 복장과 복고풍의 머리 모양도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색바랜 흑백 필름 위에 붉은 장미꽃 한 송이만 두드러지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과유불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요모조모 따져보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2시간의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흥미진진한 영화다. 무엇보다 주연 배우들의 명불허전 연기력이 영화 속 다른 모든 모자란 부분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왜 그들을 최고의 배우라고 손꼽는지 대번 수긍하게 될 것이다.
'대배우' 김혜수와 염정아의 '케미'에다, 조인성과 박정민의 악역 경쟁은 점입가경의 흥분을 일으킨다. 덩달아 조연 배우조차 환상적인 연기로 그들 사이에 스며들어 영화를 힘있게 끌고 나간다. 그중에도 다방 마담 역의 고민시는 능숙하고 노련한 중견 배우의 느낌마저 풍긴다.
무엇보다 장면마다 맞춤한 배경 음악이 압권이다. 장면이 전환될 때 잠시 눈을 감으면, 삽입된 음악이 배우들의 대사를 대신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70년대라는 걸 굳이 복장이나 다른 소품들을 통해 보여줄 필요가 없다. 배경 음악 하나로 충분하다.
서로 속고 속이는 밀수꾼들이 배를 타고 나설 때 들려오는 노래 '앵두'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로 시작된다. 밀수품을 싣고 바람을 가르며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경쾌한 리듬의 김 트리오의 '연안 부두'가 관객들의 흥을 북돋운다. 다들 한몫 잡은 뒤, 돈을 흥청망청 쓰는 대목에서는 어김없이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는 가수 송대관의 목소리가 맞춤한다.
시나리오에 맞춰 적절한 곡을 찾아 깐 건지, 아니면 70년대 히트곡을 주제로 시나리오를 쓴 건지 헷갈릴 만큼 기막히게 어울린다. 일례로, 극중 인물 권필삼은 월남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권 상사로 불리는데, 배경 음악으로 사용된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모티프였음이 분명하다. 나 같은 중년이라면 OST에만 귀를 기울여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은 장기하였다. '싸구려 커피'에서 '부럽지가 않어'에 이르기까지 매번 실험적인 곡들을 선보이면서 두터운 골수팬 층을 거느리고 있는 뮤지션이다. 그가 곡을 직접 선택하고 일부는 연주까지 도맡았다고 한다. 이 영화가 음악 감독 데뷔작이라는데, 과연 그의 음악적 실험은 어디에서 멈출지 자못 궁금하다.
지난달 26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보름도 안 되어 손익분기점이라는 400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국내외 영화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독주하는 모습이다.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에다 '장기하다운' 음악까지 어우러져 감칠맛 나는 영화라는 입소문을 타고 있다. 어쨌든 감독이 들으면 조금은 서운할 영화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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