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넘버 90%]⑩"권위주의 뿌리 양당, 박정희 시대 잔재 청산해야 개혁"
①안정성 ②깨끗한 선거 기풍 오히려 발목
"다양성 담아내지 못해…시민들 거리로"
"민주화 이후에도 두 개의 정당은 군소정당의 진입을 막아 오면서 정당 체계를 공고히 해왔습니다. 단순히 제도적인 개혁 이야기를 하기 전에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국회를 비롯한) 국기 기관에 남아 있는 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명희 미시간 주립대학교 조교수는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에서 진행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정당 체계는 결국 그 뿌리를 권위주의 체제에 두고 있다"면서 이처럼 말했다. 중국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와 미국 미주리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조교수는 유럽 내 권위주의 정치학 전문가로 평가 받는다. 코펜하겐대학교 정치학과 산하 아시아 연구를 위한 대학교(NIAS·Nordic Institute of Asian Sutides)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 인터뷰 당시 이 조교수는 코펜하겐대학교 정치학과 산하 NIAS 박사후과정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이 조교수는 조지아 대학교 국제무역 및 안보센터의 비거주 펠로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조교수는 한반도와 중국의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 유산을 연구해왔다. 한국의 권위주의 유산은 군부 시절인 박정희 시대 때 주로 만들어졌다. 권위주의 유산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권위주의하에서 여당이었던 정당들이 민주화된 사회에서 정당이 된 경우 이를 권위주의 계승 정당 혹은 ASP(Authoritarian Successor Party)라고 부른다. 한국의 ASP는 현 국민의힘이다. 한국의 주요 non-ASP인 현 더불어민주당도 그 뿌리를 권위주의 야당(opposition party)에 두고 있다. 결국 현재 한국의 양당 체계는 결국 그 뿌리를 권위주의 체제에 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조교수는 "한국 정당 체계는 이런 의미에서 강력하고, 시민들도 명확한 정당 정체성을 가진 편"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사실상 양당제에 가까운 정당 체계가 유지된 것은 권위주의에 뿌리를 둔 두 정당이 군소정당의 진입을 막으면서 정당 체계를 공고히 해왔기 때문이다. 이 조교수는 "에릭 모브랜드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권위주의 정당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박정희 시절부터 만들어진 ‘안정성(Stability)’과 ‘깨끗한 선거’ 기풍이 꼽힌다"면서 "군소정당이 많이 생기면 안정성이 깨진다는 논리로 군소정당의 난립을 막는 것을 정당화해왔다"고 지적했다.
또 4·19 혁명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깨끗한 선거를 추구하는 선거 기풍을 만들었고, 깨끗한 선거를 추구하면서 시민들과 후보자들 간 소통을 최대한 줄이는 식으로 제도화했다. "소통이 많아지면 뇌물 등을 이용한 부정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 인해 한국의 법정 선거 운동 기간은 유독 짧다. 공직선거법 제33조에 따르면 대통령 선거에서 공식 선거 운동 기간은 23일,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 및 지방자치단체장 등 선거는 14일이다. 덴마크, 독일, 미국, 스웨덴 등 대부분 국가는 선거 운동 기간 제한이 없다. 이 조교수는 "깨끗한 선거를 목표로 짧은 선거운동 기간과 후보자와 일반 국민과의 소통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면서 "짧은 선거 기간이 반드시 좋은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시민들과 정치인들의 건강한 소통마저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교수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비례대표 의원 수 확대나 중대선거구제로 개편 등 제도가 바뀐다고 해도 국회가 전면적으로 변화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제도가 바뀌면 그에 따라 열거된 문제점들이 어느 정도는 완화될 것"이라면서도 "기존의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제도의 도입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어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일단 가능한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통합진보당 해체에서도 나타났듯 근본적인 민주주의와 선거의 기풍이 바뀌지 않는 한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군소정당이 비례대표제를 통해 제도권에 진입한다고 해도, 이런 진입을 막으려는 주요 정당의 노력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 정치권이 양당에 대한 공방만 지속하면서 미래 의제, 예컨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기후 위기 등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이 조교수는 "현재 한국은 국제 정치 속에서 중견국(middle power)으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싶어하며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에서도 그에 따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심각한 논의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정치권에서의 침묵은 시민사회에서의 침묵으로 이어진다"며 "물론 시민사회에서 기후 문제에 대한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데 소수의 목소리로 그치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목소리가 다수의 목소리가 되려면 국회에서 좀 더 심각하게 이 문제를 논의해야만 한다"면서 "한국의 대외정책은 여전히 한반도의 문제, 예를 들어 대북 문제나 한미동맹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글로벌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는 만큼, 입법 기관인 국회도 이에 맞게 좀 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양당 체제가 계속될수록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낮아질 것으로 이 조교수는 전망했다. 그는 "정당들에 의해 대변되지 못하는 목소리가 거리에서 시위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면서 "시위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목소리가 제도권에서 대표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스웨덴 브이뎀 지수 참여·숙의 민주주의 ↓
이코노미스트 "대립적 정당정치 민주주의 타격"
6월 민주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민주주의 관련 지표들은 한국 정치가 극단적인 양극화로 인해 질적으로 퇴행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한다.
스웨덴 예테보리대학의 브이뎀(V-Dem·2022년 기준)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179개국 중 28위를 차지했다. 브이뎀지수는 민주주의의 정도를 측정하는 지수로 국제 사회에서 널리 쓰인다.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국은 대체로 20위권에 머물러 있다. 브이뎀지수에서 한국이 낮은 점수를 받은 부문은 참여(Participatory·54위)와 숙의(Deliberative·45위)이다. 선거(Electoral)·자유(Liberal)·평등(Egalitarian) 부문이 20위권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런 경향은 올해 초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한 민주주의지수에서도 나타났다.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2022년 한국의 민주주의지수는 24위로 2021년 16위에서 8계단 추락했다. 이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다년간의 대립적인 정당 정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타격을 입혔다"며 "정치인들은 경쟁 상대인 정치인을 무너뜨리는 데에 정치적 에너지를 집중시키며,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고 합의를 찾는 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과도한 정치 양극화는 입법 교착 상태를 유발해 정치 과정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적 거버넌스 파행’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정치적 양극화는 양당 체제일 때 더 심화할 수 있다. 실제 정당 지지자들의 상대 정당에 대한 비호감도는 다당제 국가보다 양당제 국가에서 훨씬 더 높았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정치 양극화 현황과 제도적 대안에 관한 국민인식 조사’를 자체 분석한 결과 양당제 국가인 미국과 영국이 상대 정당에 대한 비호감도가 최근 20년간 증가한 반면, 다당제 국가인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등은 상대당에 대한 비호감도가 훨씬 더 낮았다.
해당 연구를 진행한 류현숙 한국행정연구원 박사는 "당파적 정체성에 입각한 정치는 여야 간 협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면서 "특히 대통령 1인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 구조와 승자 독식의 선거 제도에서 양대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에게는 상대 정당과 연합과 협치에 나설 유인이 없다"고 분석했다. 류 박사는 "정치 양극화 극복을 위해 권력 구조와 의회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코펜하겐=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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