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하라고 10억 줬더니...부패 장관, 불륜 의원 '싱가포르 쇼크'
‘아시아 1위 청렴 국가’ 싱가포르가 충격에 빠졌다. 교통부 장관이 부정청탁 의혹으로 체포된 데 이어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은 불륜 사실이 드러나 의원직을 내려놨다. 연이은 스캔들로 싱가포르의 '반부패' 이미지는 물론, 60년 가까이 장기 집권한 인민행동당(PAP)의 통치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지난 2일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는 의회에 출석해 “일련의 스캔들은 싱가포르의 정치·경제적 안정성에 큰 충격을 줬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여당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무관용 원칙을 지켜 싱가포르에 대한 신뢰를 지키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 총리가 사과를 한 건 지난달 12일 시작된 싱가포르 정계의 대형 스캔들 때문이다. 스트레이츠타임스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이날 싱가포르 부패행위조사국(CPIB)이 수브라마냠 이스와란 교통부 장관과 말레이시아 출신의 부동산 재벌 옹벵셍(王明星) 호텔프로퍼티(HPL) 회장을 체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두 사람은 이후 보석으로 석방돼 CPIB의 조사를 받고 있다.
F1유치 교통부 장관, 부동산 재벌과 부패 의혹
국회의장 등 여야 의원들, ‘부적절한 관계’ 들통
같은 날 야당인 노동자당(WP)에서도 기혼자인 레온 페레라 의원과 니콜 세아 청년위원장(전 의원)이 의원직과 당적을 내려놨다. 페레라 의원실의 운전기사가 폭로한 불륜 의혹을 부인했던 두 사람은 이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영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퍼진 뒤에야 사실로 인정했다.
싱가포르 정가의 연이은 스캔들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최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이 부패 등의 스캔들에 연루된 것 자체가 흔치 않아서다. 실제로 CPIB가 부패 혐의로 내각 장관을 조사한 건 1986년 이후 처음이다. 현직 의원이 개인적 물의로 인해 자진 사임한 것도 2016년 이후 7년 만이다.
싱가포르가 '청렴 국가'로 자리 잡은 건 국부로 통하는 리콴유(李光耀) 초대 총리가 청렴을 통치 원칙으로 내세운 이래 부패에 엄격하게 대응해 온 전통 때문이다. 리 전 총리는 자치정부 시절이던 1960년 부패방지법을 제정해 공공과 민간의 모든 부패행위를 조사할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부패가 저질러졌다는 믿을 만한 정보나 합리적인 의심이 있으면 총리에게 직접 보고한 뒤 영장 없이 체포하고, 증거도 압수할 수 있게 했다. 심지어 공직자의 경우 뇌물을 받지 않아도 받을 의사가 있었거나 이에 준하는 처신을 했다면 처벌 받을 수 있다.
대신 공직자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급여를 제공해 뇌물에 흔들리지 않도록 했다. 초급 장관은 싱가포르 소득 상위 1000명의 중간소득 60% 수준의 연봉을 주는데, 이 기준으로 현재 110만 싱가포르달러(약 10억7300만원)에 달하는 급여를 받는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싱가포르는 국제투명성기구(TI)가 지난 1월 발표한 ‘2022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 조사에서 국가 청렴도 5위(아시아 1위)에 올랐다.
정부가 부패 감시 체계 독점
전문가들은 정부에만 집중된 부패 감시 메커니즘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안 총 싱가포르국립대 정치학과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정부와 PAP가 부패에 관해 충분한 견제 능력을 보여주는 것에 한계를 노출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PAP의 일당 독재를 용인했던 건 부패를 차단하는 철저한 자정 능력이었는데, 이게 작동하지 않으면 싱가포르 정치에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얘기다.
총리는 ‘제 식구 감싸기’…58년 일당독재 위기?
그렇지 않아도 싱가포르에선 주택 가격과 임대료가 급등하며 젊은 층의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PAP의 인기는 추락하고 있다. PAP는 지난 2020년 총선에서 전체 93석 중 야당인 WP에 10석을 내줬다. 싱가포르 건국 이래 야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가져간 것으로 PAP가 ‘사실상의 패배’를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일단 리 총리는 조기 총선을 치르지 않고 2025년에 총선을 예정대로 치른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오는 9월 있을 대통령(상징적 국가수반) 선거에서 민심이 이반되는 결과가 나타날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탄 교수는 “대선을 앞두고 주택 가격 급등이 정치적 문제로 부상하며 PAP를 압박하는 가운데 정치 스캔들이 터졌다”며 “PAP가 떨어진 신뢰를 단기간에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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