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플립 턴과 실리콘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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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겨루는 운동경기에서 1초는 엄청난 격차다.
키에프는 턴 지점까지 간 뒤 몸을 접어 벽을 발로 차고, 그 추진력으로 속도를 더하는 '플립 턴(flip turn)' 기술을 선보였다.
플립 턴은 역발상 혹은 혁신의 결과물이다.
이제 플립 턴은 동네 수영장에서 '수력'이 제법 되는 이들은 누구나 구사하는 보편적 기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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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겨루는 운동경기에서 1초는 엄청난 격차다. 특히 단거리 수영 종목이 그렇다. 시간을 줄이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50m 레인의 반대편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에 있다. ‘이 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벽을 손으로 찍은 뒤 몸을 돌리는 ‘턴’ 방식을 썼다. 관행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배영 100야드 경기에서 미국 선수 아돌프 키에프의 발에 깨졌다. 배영은 다른 영법과 달리 누워서 수영하기 때문에 턴 동작이 까다롭다. 턴을 하면서 속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키에프는 턴 지점까지 간 뒤 몸을 접어 벽을 발로 차고, 그 추진력으로 속도를 더하는 ‘플립 턴(flip turn)’ 기술을 선보였다. 17세 나이의 그는 올림픽에서 기록을 1초 이상 단축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플립 턴은 역발상 혹은 혁신의 결과물이다. 손이든 발이든 반대편 벽을 찍은 뒤에 출발한다는 규정 안에서 발이 훨씬 강한 힘을 낸다는 데 착안했다. 이제 플립 턴은 동네 수영장에서 ‘수력’이 제법 되는 이들은 누구나 구사하는 보편적 기술이 됐다.
그리고 역발상(혁신)은 대만의 ‘실리콘 방패’에서 또 찾을 수 있다. 석유 채굴업체에 지진파 탐측기구를 개발해 공급하던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획득한 전자기술의 우위를 바탕으로 반도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디뎠다. 보스턴 외곽의 전자회사 실바니아를 다니던 모리스 창은 1958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트랜지스터 생산라인 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곧 집적회로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전쟁을 피해 광저우, 상하이, 충칭, 홍콩 등을 떠돌았던 10대 소년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이다.
반도체 사업으로 잘나가던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1960년대 들어 생산단가를 낮춰 민간 시장을 키우려고 했다. 조립공장을 세울 만한 임금이 낮은 곳을 찾았고, 1968년 중국 본토 출신이던 모리스 창은 처음으로 대만을 방문했다. 그는 대만 경제부 장관 리궈딩(李國鼎)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대만 경제 기적의 아버지’라 불리는 리궈딩은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는 중이었다. 대만은 과연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지 불안했다. 리궈딩은 반도체를 매개로 하는 미국과의 경제 결속이라는 첫 번째 ‘플립 턴’을 찾아냈다.
대만은 1980년대에 두 번째 ‘플립 턴’을 시도한다. 폭 131~180㎞에 불과한 해협 건너편 중국의 고속성장을 보면서 대만에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막대한 인구,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중국과의 경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느낀 대만 정부는 다시 반도체에 눈길을 뒀다. 리궈딩은 1985년 모리스 창에게 파격적 제안을 했다. 반도체 산업의 전권을 주고, 엄청난 규모의 자금 지원과 광범위한 세제 혜택을 약속했다. 저렴해진 연산력(computing power)을 바탕으로 수많은 기기에 반도체가 들어갈 거라 봤던 모리스 창은 ‘파운드리’(고객이 설계한 칩을 생산하는 제조 특화한 전문기업)라는 새 사업 모델을 대만에 심었다. 이렇게 ‘국가 프로젝트’ TSMC가 1987년 탄생했고, 중국의 위협을 막아줄 ‘반도체 방패’가 세워졌다.
혁신은 간절함과 필요를 불씨로 한다. 몸을 접어 발로 벽을 찰 수 있는 역발상과 결단을 땔감으로 쓴다. 마침 한국 경제는 간절함과 필요를 갖고 있다. 무역수지 적자, 잇따른 저성장, 잠재성장력 고갈, 저출산은 위기의 전주곡이다. 경쟁국들은 수소, 2차전지, 인공지능(AI), 로봇, 미래 반도체, 바이오 신약 등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에서 역발상과 결단을 찾아보기 어렵다. 턴을 해야 할 지점이 다가오는데, 그저 우물쭈물하고 있다.
김찬희 산업1부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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