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잼버리 ‘재난’
영국 남부에 있는 조그만 섬인 브라운시(Brownsea). 우거진 숲에 붉은 다람쥐·공작·왜가리 같은 야생 동물이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섬이다. 영국 육군 중장이었던 로버트 베이든 파월은 1907년 브라운시섬으로 휴가를 떠났다. 어릴 적 형제들과 작은 배를 타고 건너가 모험을 하던 추억의 섬이었다.
파월은 보어전쟁(1899~1902년)의 영웅이었다. 참혹한 전쟁 한가운데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기도 했다. 그가 경험한 전쟁의 위기는 나이와 신분,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때, 그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브라운시섬은 그 ‘실험’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파월은 그해 8월 20명의 소년을 섬으로 불러모았다. 귀족에서 농민까지, 출신은 다양했다. 신분에 따라 교육·생활 환경이 크게 달랐던 당시 영국에선 혁신적인 선택이었다. 파월이 의도한 일이었다. 그가 할 훈련은 특권층이 아닌 모든 이를 위한 것이었다.
파월은 20명 소년과 함께 야영을 시작했다. 오두막 만들기, 낯선 곳에서 길 찾기, 동물과 식물 관찰, 화재 진압과 생존 수영, 구조 활동, 응급 처치까지. 다양한 생존 훈련이 9일간 이어졌다. 용기와 봉사, 시민의 의무에 대한 교육도 빠지지 않았다. 파월이 내세운 신조는 ‘준비하라(Be prepared)’였다.
파월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08년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Scouting for Boys)』이란 책을 써냈다. 출간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5개 언어로 번역됐다. 1909년 영국을 시작으로 스카우트는 172개국 1억여 명 회원을 둔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국 새만금에서 ‘2023년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열리고 있다. 153개국 4만여 청소년이 즐겨야 할 축제는 악몽이 됐다. 폭염과 벌레, 비위생적인 환경, 턱없이 부실한 음식에 환자가 속출했다.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 대표단이 조기 철수에 나섰다. 정부도 태풍을 이유로 대피 겸 철수를 결정했지만 “꿈이 악몽으로 변했다”(로이터통신), “끔찍하다. 난장판이다”(가디언), “재난으로 낙인 찍혔다”(인디펜던트)는 각국 비판이 이미 나온 뒤다. ‘준비하라’는 스카우트 모토를 철저히 망각한 대가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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