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부도' 죄명, 암살범은 승승장구
[김삼웅 기자]
김옥균의 시신은 이홍장의 지시에 따라 중국 군함 위에징호에 실려 4월 12일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1884년 10월 인천항을 떠나 일본 우편선으로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고인이 되어 그곳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암살범 홍종우도 타고 있었다.
김옥균의 시신이 안치된 중국식 큰 관 위에는 홍종우가 썼다는 〈대역부도 옥균(大逆不道 玉均)〉이란 글이 쓰여 있었고 중국 군인들이 호위하였다.
김옥균의 시신이 형장인 양화진에 도착하자 조선 내에서는 김옥균을 인조 때 반란을 일으킨 이괄에 준해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조선정부는 일본공사 오오도리를 비롯한 서울주재 외교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와 홍문관들의 소청을 받아들여 김옥균에게 능지처참의 형을 내렸다. (주석 15)
수구권력의 핵심은 보복심에서, 그 아류들은 이참에 그들에게 잘보이고자 연명으로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영의정 심순택, 행판중추부부사 김홍집, 좌의정 조병세, 행판중추부사 정범조 등이다. 이들의 상소문과 고종의 비답이다.
어제 역적 김옥균의 시체를 검사할 것을 제의해 승인을 받고 해당 관청에 당일로 거행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는데 방금 한성부와 형조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규정대로 검사한 결과 그것이 역적 김옥균의 시체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 역적은 바로 천하 고금에 없는 흉악한 역적으로서 온 나라 사람들 치고 누군들 그의 사지를 찢고 그의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외국에 가서 목숨을 부지하여 오랫동안 천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갈수록 더욱 들끓었습니다. 지난번에 상하이에서 온 전보를 받고 홍종우가 사살한 거사가 있은 것을 알았는데 역적의 시체가 이제 이미 압송되어 왔고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명되었으니 10여 년 동안 귀신과 사람이 격분해 하던 것이 여기서 좀 풀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산채로 잡아다가 시원히 사형에 처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꿇어앉히고 목을 베어 나라의 법을 소급하여 시행할 수는 있겠으니 반란을 음모한 무도한 큰 역적에 관한 법조문을 적용하고 이괄과 신치운에게 시행한 전례를 더 적용함으로써 천하 후세에 반역을 음모하는 역적들이 두려워하게 하기 바랍니다. 신 등은 감히 눈을 부릅뜨고 기염을 토하는 의리를 본받아 서로 이끌고 연명으로 진술하니 빨리 처분을 내리기 바랍니다.
지금 경들의 간절한 청은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고 징계하고 성토하는 의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한 귀신과 사람이 다같이 분격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되어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의한 것은 그대로 승인한다.(주석 16)
일본의 <지지신뽀>는 김옥균 시체에 가해진 능지처참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옥균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 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 다음 왼쪽 팔목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1촌, 길이 6촌씩 13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주석 17)
조선의 민씨수구 정권의 보복은 가혹했다. 그가 비록 해외의 망명객이지만, 언제 회오리바람처럼 군사를 이끌고 자신들의 턱밑으로 처들어와 목을 노릴지 항상 불안공포에 시달렸다. 그래서 수차례 암살단을 일본으로 파견했지만 번번히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야 편안한 잠을 이루게 되었음에 보복심리가 작동하여 시신이나마 능지처참으로 다스리고, 그 잔당이나 유사한 음모를 꾸미는 '불온세력'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조선 수구파 정권 및 청국의 그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이 큰데다가, (…) 일본 내의 정치적 움직임 때문에, 망명 중에도 그의 존재는 항상 조선은 물론 일본 국내 정치와 한ㆍ청ㆍ일 삼국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주석 18)
암살범 홍종우는 수구파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역적을 퇴치한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행세하였다.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이승만 정권에서 실력자로 행세하듯 그도 다르지 않았다. 의정부 총무국장, 평리원 재판장, 중추원 의관 등을 지내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의 정치상황이 바뀌자 청국으로 망명, 1905년 11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암살자의 운명도 끝내 평온하지 않았다.
주석
15> 조재곤, 앞의 책, 57쪽.
16> <고종실록>, 고종 31년 3월 9일.
17> 조재건, 앞의 책, 57~58쪽, 재인용.
18> 김영작, 앞의 책,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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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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