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만에 열리는 신비주의 작가의 전시, 흥미롭네요
[안치용 기자]
나무 위에 돌이 얹혀 있다. 나무는 뿌리를 땅에 내린, 즉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다. 벌목 당해 생명의 자격을 잃은 바이오매스로서 나무조각. 그리고 성인이 들기에 어렵지 않은 크기의 그냥 평범한 돌. 이곳이 아니었다면 목재가 아닌 폐목에 불과하였을 어떤 나무토막이 용도 불명의 돌을 만났다.
2023년 7월 27일부터 12월 3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에 전시된 작품의 하나이다.
▲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
ⓒ 안치용 |
나무는 생명이지만, 죽은 나무는 물질이다. 수종이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는 Y자 모양의 나무토막은 잘림으로써 바로 그 순간에 하나의 물체가 된다. Y자는 위에, 그 벌어짐의 중간에 돌을 얹은 채 직립한다. 직립한 다음에 돌을 인 나무가 되었겠지만, 나무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돌이 그곳에 내려앉았는지, 아니면 나무가 돌을 이고 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판단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나무로 된 탁자 위에서 질감이 다른 두 물체가 어우러져 균형을 유지하며 존재를 제시한다.
거기로 조명이 쏟아져 발아래 검은 그림자가 뚜렷하다. 존재는 직립하고 그 그림자는 하강한다. 전시물을 지지하는 탁자, 나무로 보이는 Y자는 바이오매스(biomass)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후자는 배우이고 전자가 무대라는 게 차이이다. 폐목과 목재라는 인간 중심의 구분법을 적용할 수도 있다. 배우 역할을 하는 직립 바이오매스 Y가 진 돌덩이는, 폐목의 두 팔 사이에서 숨은 듯 자는 듯 풍경에 긴장을 형성한다.
이 전시물은 당연히 전시물 자체로 감상할 수 있고, 감상하면 된다. 그때는 관람객 숫자만큼 다양한 반응과 해석이 나올 것이다. 김범 작가는 이 전시물에다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이제 유기물(나무토막)과 무기물(돌)로 구성된 비(非)생명체는 생명을 부여받는다. 돌은 새가 되어야 하고, 언급되지 않은 폐목은 새가 깃든, 그러므로 살아있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돌이 새가 됨으로써 나무는 다시 생명을 획득한다.
이러한 명명으로 역전이 일어난다. 과거에 분명 생명이었던 Y라는 유기물은, 새롭게 비상하려는 무기물을 보좌하여 생명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무대를 꽉 채우지만, 한없이 투명해진다. Y가 제목에서 소거되었기 때문이다. 자상한 관객은, 네가 없었다면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의 형상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란 위로를 Y에게 건넬 법하다.
중력에 굴복해야 하는 만만한 무엇에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중력의 지배를 꽤 덜어내 가장 큰 비약을 성취한 돌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굳이 흠을 잡자면 존재 규정이 수동태라는 것과 함께 존재가 여전히 미확정 상황이라는 걸 들 수 있다. 결정적으로, 돌은 자신이 새라고 배웠을 뿐 여전히 새가 아니다. "새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만일 수동태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우격다짐으로 돌파하는 존재의 틈새를 모색할 수 있었으련만, 그에게 이 전시에서 돌파는 없다.
세 가지 질감과 그 아래 인위적 질감까지 포함해 이 조형물에서 인간 실존의 투사를 엿본다. 실존주의의 실존은 최대 긍정 속에서도 수동태에 머문다. 의미 있는 비약은 비상하지 못한다. 마침내 다시 중력에 굴복하고 말 돌의 수동태의 슬픔과 돌의 (실현되지 않은) 비상을 추앙하였지만 전혀 호명되지 못한 Y의 소외는, 이 조형물의 조형과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이란 명명을 통해서 도저해진다.
▲ 4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을 찾은 필자가 작가의 '자화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
ⓒ 안치용 |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김범 작가의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은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산출하며 그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연 김범의 지난 30여 년 작품활동을 엿볼 수 있는 기획전이다. 대표 전시관인 그라운드갤러리와 블랙박스에서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을 포함해 그의 작품 70여 점이 공개된다. 개인전으로는 13년 만, 최대 규모 전시이다.
리움은 1963년생인 작가의 1990년대 초기작부터 대표 연작 '교육된 사물들', '친숙한 고통', '청사진과 조감도' 등과 함께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대중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신비주의 성향을 독창적인 작품성과 연결지으며, 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힌 그의 전시를 보는 건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
ⓒ 안치용 |
▲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
ⓒ 안치용 |
'노란 비명 그리기'는 가장 독특한 작품들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완성된 그림을 본 다음에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데, 튜토리얼 영상에 실제로 '노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들어 있다. 관람객은 비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그 이상한 소리를 낸 영상 속 화가를 김범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지만 그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를 연기한 배우이다.
▲ ‘노란 비명 그리기’ |
ⓒ 안치용 |
중층화의 방식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파란 그림'은 파랗지 않다. 캔버스 한가운데 "PAINT THIS CANVAS PART BY PART WITH BLUE PAINT"라는 수미상관의 문장이 적혀 있어서 그 문장 안의 'BLUE'로 '파란 그림'의 단서를 찾게 된다. 한두 걸음 앞으로 걸어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BLUE' 천지다. 'BLUE'를 수식어로 단 많은 명사가 점처럼 흩어져 있다. 두 어절로 이루어져 중앙 문장을 둘러싼 것들이 다 'BLUE'이다. 파란 거리, 파란 여자, 파란 새, 파란 벽 등등이 그렇다.
▲ ‘파란 그림’ |
ⓒ 안치용 |
캔버스 위에서 기표와 기의는 그 흔한 충돌 없이 평면에서 망연자실하다가 기표와 기의를 무력화하고 캔버스 너머로 의미를 비산함으로써 이미지를 고정한다. 콩물에 간수를 넣어 두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닮았다. 앞선 문장에서처럼 'PAINT'단어가 동사로 시작해 명사로 끝나듯, 창작자는 수용자와 상시로, 관람한 관람객의 뇌리에 들어가 소통하며 종국에 이미지를 담금질해낸다.
▲ ‘무제’(제조 #1 내부/외부) |
ⓒ 안치용 |
▲ ‘무제’(제조 #1 내부/외부) |
ⓒ 안치용 |
'무제'(제조 #1 내부/외부)는 기표와 기의의 충돌 혹은 상충이란 언어학의 상투적 설정을 구상으로 구현한 느낌을 준다. 김범은 기표와 기의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묶어서 예술로서 형상화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다. 그 충돌 혹은 상충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위로 두부가 떠오르듯 이미지가 떠오른다.
관람객은 반대로 이미지를 통해 그 아래 혼란스러운 탐색의 흔적을 발굴해야 한다. 그의 작품세계가 물활론에 근거했다기보다는 물(物)의 탐색을 통해 세계에 다가간다고 봐야 한다. 작가나 수용자나 세계에 발 붙이고 있으니 그 탐색은 고래의 성찰과 맞닿아 있다. 진지함이 참신함의 동기가 된 예를 김범에서 목격할 수 있다.
글 안치용(평론가, 크리티크M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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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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