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써는 아저씨 보고도 놀랐다…전 국민 '테러 트라우마'
“열차 안에 난동자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승객분들은 다음 역에서 모두 내려 주세요.”
6일 저녁 8시 30분쯤 서울 지하철 9호선 열차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칼부림이 났다”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 등의 신고가 소방과 경찰을 통해 접수됐다. 안내 방송을 들은 시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칸을 옮겨 다니느라 열차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열차가 신논현역에 정차하자 승객들이 뛰쳐나왔고, 이 과정에서 7명이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소방과 경찰, 특공대까지 투입되면서 상황은 30분 만에 종료됐다. 온라인에서는 ‘가스 누출’ ‘생화학 무기’ ‘칼부림 사건’ 등의 루머가 돌았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소방 관계자는 “최근 흉기 난동으로 불안한 시민들께서 잘못된 신고를 하신 것 같다”며 “단순히 승객이 열차에 많이 타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열차 안에서 휴대전화로 BTS 슈가의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승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 소음을 피하기 위해 일부 승객들이 옆 칸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 다니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고, 최근 흉기 난동 사건으로 두려움을 느낀 일부 시민들은 ‘흉기 난동이 난 것 같다’는 오인 신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일 오후 8시 서울 지하철 1호선 개봉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 남성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역곡역에서 이 남성을 붙잡았으나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란 시민들이 열차 밖으로 뛰쳐나가는 과정에서 2명이 경상을 입었다.
최근 서울 신림역에 이어 분당 서현역에서도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지면서 작은 소동에도 두려움이 극대화되는 ‘테러 트라우마’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놀란 시민들의 오인 신고가 이어지면서 다중이 밀집된 장소에서 대피 과정에 부상을 입는 사례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오인 신고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테러범으로 오해받는 일까지 생겼다. 지난 5일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운동을 하던 중학교 3학년 A군은 테러범으로 오인됐다. 당시 축구를 하던 중학생들이 A군이 뛰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회색 바지에 검은색 바람막이를 입은 남자가 손에 칼을 들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 신고를 접수한 인근 경찰이 A군을 잡기 위해 수색에 나섰고, A군은 사복 경찰이 자신을 보고 달려오는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가다가 넘어지면서 수갑을 차게 됐다.
피해 학생의 부모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당시 아이를 바라보는 경찰의 시선은 아이가 범죄자라는 걸 확신한 듯한 표정이었다고 한다”며 “출동 전에 공원 CCTV만 확인했어도 아이가 칼을 들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온라인 상에는 테러와 관련한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4일 개설된 ‘칼부림 및 각종 테러 안내 업데이트’라는 테러 관련 제보 계정은 사흘 만에 3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모았다. 계정 운영자인 B씨는 자신을 동대문구에 사는 중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온라인 상의 살인예고 글을 정리하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페이지를 개설했다”며 “하루에 800개 정도의 제보가 들어오는데, 90%는 지인에게 들었다는 식의 허위 제보”라고 말했다. “가장 어이없었던 제보는 칼 소지자가 파인애플 (판매) 아저씨였던 경우”라고 덧붙였다.
경찰에 따르면 7일 오전 7시 기준으로 살인예고 관련 수사 중인 사건은 187건이다. 59명을 검거했고 이 가운데 3명은 구속했다. 우종수 국가수사본부장은 이날 오전 기자간담회에서 의정부 중학생 사건과 관련해 “오인 신고로 인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국민 불안감을 해소하되 과도한 의욕이 앞선 법 집행으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현장 직원에게 적법 절차 준수를 독려하겠다”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연이은 범죄로 사회 기저 불안이 높아진 상태”라며 “당분간 오인 신고를 막는 게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최근 오인 신고 해프닝은 일종의 집단심리로 인한 동조현상”이라며 “주변 반응에 바로 대응하기보다는 외부와 소통하면서 막연한 불안감을 잠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투명한 정보 창구도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혜연 기자 shin.hye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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