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추 농사는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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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숙 기자]
6월 말부터 한 달 가까이나 되는 지루한 장마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일 35도 이상 오르내린다. 가만히 있어도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흐른다. 지자체와 행정안전부에서는 야외활동(논밭과 공사장 일)을 자제하라는 안전 안내 문자를 시간대별로 보내온다. 고추밭에 농약 치러 가야 하는데 남편이 말린다.
작년(2022)에 고추 150주를 심어 스무 근 넘게 땄다. 오랫동안 고추 농사를 지은 지인이 열매를 따고 나면 농약을 해야 한다고 조언까지 해줬는데 살아남은 것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에 약도 겨우 세 번만 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스무 근이나, 내 딴에는 큰 수확이다. 그걸로 고추장도 담그고, 김장도 했으며 고춧가루까지 얻고 나니 뿌듯하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작년에 재미를 봐 올해는 더 욕심을 부렸다. 지난 5월, 350주를 주문해 밭 가득 심었다. 1주일 후에 남편이 지주를 박고 고추 모종 빙 둘러 하얀 노끈으로 묶어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잎이 무성해지는 고추 모종을 보니 마음이 넉넉하기까지 했다.
올해는 6월 말부터 시작한 장마가 한 달여 간이나 길어질 거라는 기상청 예보가 있어 큰비 오기 전 둘러볼 겸 고추밭에 갔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간의 비에 벌써 넘어진 모종이 여럿 보였다.
남편이 두른 노끈이 모종 키보다 훨씬 위쪽에 자리하고 세게 당겨 묶었는지 여유가 없어 보였다. 고추나무가 커도 노끈 사이로 넣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요령이 없으니 하루 힘들게 일한 게 아무 쓸모가 없게 됐다. 초보 농사꾼 티가 팍팍 났다.
할 수 없이 가위와 노끈을 준비해 하나하나 다시 묶었다. 지루한 작업이었다. 다리와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욕심부린 나 자신에게 미쳤다고 욕도 하며 후회하기도 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폭우가 온다는데 도중에 그만둘 수도 없었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니 산에 오른 것 마냥 양쪽 허벅지 근육이 아팠다. 아침에 시작한 일이 오후 다섯 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허리를 바로 펼 수가 없을 정도다. 1,000주가 넘는 고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온몸이 아팠다. 특히 왼쪽 허리는 펴지도 못할 만큼 욱신거렸다. 원래 부실한 허리가 단단히 고장이 난 모양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씻고 누웠다.
▲ 병에 시달리는 고추나무 탄저병 약을 쳤는데도 시름시름 앓는 고추나무 |
ⓒ 최미숙 |
한 달 가까이 비가 왔다. 특히 광주 전남 지방 피해가 심했다. 가끔 하루씩은 개기도 했지만 해가 보인 날이 언제인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날마다 엄청나게 쏟아졌다. 열대성 소나기인 스콜처럼 갑자기 쏟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개기도 했다. 주변에서 올해는 비가 많이 와 농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허리도 아프고 날씨 핑계로 고추밭에 가지 못했다. 그래도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갠 날, 밭에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상추는 다 녹아버렸고 그동안 실하게 달린 고추는 군데군데가 물컹하게 썩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병이 온 게 확실했다. 산비탈과 집이 무너지고 도심과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잇따랐는데 농작물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농약 방에 가서 증상을 말했더니 고추무름병이라고 했다. 주인이 준 약을 물과 희석해 뿌렸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예방이 최고라고 하는데 약을 쓰지 않으려는 내 생각이 오만이었나 싶다. 일주일 후 비가 잠깐 갠 날 다시 한번 약을 쳤다. 그사이 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쏟아졌다.
농약을 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먼저 밭으로 갔다. 열매가 주렁주렁한 고추밭을 상상하니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잎이 누렇게 변하고 고추는 말라비틀어져 성한 게 없이 다 떨어져 있었다. 풍성한 녹색 이파리 아래로 빨간 고추가 빽빽이 달린 다른 밭과는 사뭇 달랐다. 그동안 들인 공을 생각하면 이럴 수는 없었다.
▲ 휑한 고추밭 고추무름병과 탄저병으로 애쓰고 심고 가꾼 고추나무를 몽땅 뽑아버렸다. |
ⓒ 최미숙 |
그냥 둬버릴까도 생각했는데 허리에 병까지 얻어가며 공들인 것이 아까워 그럴 수도 없었다. 350주에 열린 고추 중 병든 줄기와 열매, 나무를 없애고 나니 풍성하던 밭이 휑하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농약을 물과 희석해 다시 뿌렸다. 올해는 얼마나 수확하게 될지 모르겠다. 약 기운으로 탄저병이 잡혔으면 하고 바란다.
고추 재배하는 농민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야 밭에서 수확한 만큼만 가져가도 아무 상관 없다. 약간 속상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수입을 목적으로 가족의 생계가 달렸다면 다른 문제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 약을 하느냐 마느냐는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주변에서 "농약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라고 하더니 그 말을 실감했다. 올해 고추 농사는 망쳤다. 내년부터는 할 수 없이 나도 농약 사용에 동참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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