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운이 좋아서 착한 아이들 만났다? 이래선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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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숙 기자]
방학을 맞아 아이들이 없는 텅 빈 교실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니, 목련으로 설레던 교정이 어느덧 배롱나무꽃으로 달아올라 8월을 맞이하고 있다. 부드러운 가지를 타고 올라 알알이 터진 백일홍 꽃들이 꼭 우리 반 아이들 얼굴인양, 끓어오르는 열기 속에서 기특하게 제 향기 품어내고 있는 배롱나무 꽃송이들이 한없이 어여쁘다.
꽃송이들이 번갈아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백일 동안 꽃을 피워내 백일홍이라 했던가. 한 그루, 배롱나무의 전성기를 위해 백일 동안 애쓴 꽃송이 송이처럼, 한 학기를 잘 마무리한 우리 반 아이들의 얼굴들이 책상마다 선명하다. 중학교 담임교사로서, 사진첩을 보며 1학기 교육활동을 정리해봤다.
▲ 폭염 속 만개한 교정의 배롱나무 폭염 속 알알이 영그는 꽃송이들이 우리 반 아이들 마냥 기특하고 어여쁘다. |
ⓒ 한현숙 |
지난 3월, 처음 만난 날 강당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보니 그땐 낯설기만 하던 그날의 얼굴들이 또렷이 하나하나 이름과 의미로 새겨진다. 손 하트 만들기에 서툰 나에게 누군가 친절히 알려 준 아이가 있었는데, 이제 보니 늘 친절한 웃음이 예쁜 OO이었다.
그간 웃고 떠들며 수없이 '찰칵' 카메라 소리를 낼 때마다 아이들과 함께한 추억들이 휴대전화 갤러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지난 1학기 학급 회장/부회장 선거에 출마한 아이들 4명의 선거공약까지, 희미해진 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그중 생일잔치 사진이 가장 많다. 우리 2학년의 특색사업이 생일축하잔치여서 첫 생일을 맞은 아이부터 매달, 매일 친구들의 생일을 기념하고 있다. 아이들은 생일축하위원회를 결성하여 생일축하카드를 만들고, 학급비로 생일선물을 준비하고, 당일 칠판에 가득 축하메시지를 채우며 친구의 생일을 챙긴다. 생일을 맞은 아이가 소소한 컵케이크의 촛불이지만 진심 가득한 마음을 담아 소원을 빌면 우리는 모두 박수로 응원하고 축하해 준다. 해피버스데이 투유~~ 가 울리는 행복한 아침 시작이다.
매실이 익어갈 때쯤인 지난 5월 초에는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찍은 봄소풍 사진으로 가득하다. 인천개항누리길을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볼이 빨갛게 익는 줄도 모르고 근대 역사 현장을 체험하느라 헉헉거렸지만, 곧이어 친구들과 달콤하게 먹은 짜장면과 군만두로 금세 환호성을 지른 아이들. 지시에 따라 모둠별로 안전하게 이동하고, 약속 시간을 칼같이 지킨 아이들이 그저 대견하고 고마운 하루였다.
행사가 가득 찬 5월, 교사의 날에는 깜짝 메시지와 노래를 선물 받았고, 진심을 담아 쓴 감사편지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 멈춤도 경험했다. 체육대회를 앞둔 몇 주 동안은 반티셔츠를 맞추는 과정에서 의견을 나누고, 갈등을 조정하고, 단합의 중요성과 협력의 가치를 함께 배우며 아이들이 훌쩍 성장했음을 느꼈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것, 다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다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공유하고 조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우며 반티를 주문한 후 단합의 체육대회를 안전하게 가졌다. 붉은 악마 머리띠에 해병대 콘셉트의 붉은 티셔츠를 입고, 밀리터리 무늬의 팔토시까지 챙긴 체육대회 모습이 그날의 열정을 드러낸다.
▲ 4반 파이팅! 체육대회 응원 코로나 시국에 못 했던 귀한 행사 중 하나인 체육대회, 으샤샤 온 몸을 불살랐다. |
ⓒ 한현숙 |
내친김에 연일 폭염 속,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단톡방에 안부를 물으니 답장 메시지와 이모티콘이 와르르 달린다. '보고 싶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아이들,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아이들의 사교적 멘트에 나도 웃으며 응답한다.
우리는 이렇게 한 학기를 보냈다. 다 알면서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오고 가는 눈빛 속에 신뢰를 쌓아가며, 서로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는 문장을 주고받으며 힘을 얻고, 힘을 내며, 공감하고 공유하며 지내왔다. 서로에게 진심임을 알기에 오해를 이해와 사과로 풀어낼 수 있었고, 학생과 교사로 만난 학교, 교실이기에 존중과 보호로 서로 예우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폭염 속 방학 중에도 고마움과 보고 싶음으로 떠올릴 수 있으리라.
아이들에게서 힘 얻는 교사들
이것이 보통의 상식적인 사람들이 만나 빚어내는 교사와 학생의 학교생활 모습이다. 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더라도 예측가능한 사람들이라면, 아이든, 어른이든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원래 테두리 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모습이다.
올해 나는 유독 우리 반 아이들에게서 힘을 많이 얻었다. 아침마다 만나는 그 초롱한 눈빛들이 언제나 위안을 주었다. 교사인 나의 말을 경청하고, 학급 일에 협조적이며 친구들끼리 잘 어울리는 그 밝은 에너지들이 긍정적 효과를 드러내자 교실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유쾌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마 이게 교권이 보호되고 학생인권이 보장되는, 함께 행복한 교육현장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담임으로서, 교과지도교사로서 감당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기면 이 모습은 한순간 와장창 깨져 버리는 고통과 상처의 현장이 되어 버린다. 반사회성 인격장애, 자해 충동 등 전문 의료진과 경찰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오롯이 담임이기에 혼자 끌어안고 책임감과 죄책감으로 버틴 날들과 고함, 고성으로 시작하는 막무가내 학부모의 민원 전화가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30년 동안 수없이 겪은 교육현장, 교실의 무거운 모습이다.
2023년 올해는 그저 운이 좋아 예쁜 아이들, 상식적인 부모님을 만나 무난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치부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씁쓸하고 불안하다. '복불복', 또는 '1년만 버티면 된다'라는 교사의 말은 너무 참담하지 않은가.
무례한 학부모의 도를 넘은 간섭과 민원, 치료가 시급한 아이들 문제는 교사뿐만 아니라 같은 교실의 또래에게도 심각한 문제와 피해를 유발하기 쉽다. 이렇게 가정교육이 무너지고, 아이들 속에 이기심과 피해의식이 만연한 채로 과연 공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을까?
왜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늘 힘들어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아이들의 학습권, 교사의 교육권, 학부모의 참여권 등 어느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소중한 권리들이 참다운 이름으로 제대로 발휘되어야함은 물론, 이게 안정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안정적 시스템 구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지 운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시스템 만들어지길
내가 올해 유독 담임 운이 좋아서였을까. 저 배롱나무 꽃송이 같은 우리 반 아이들이 나에게 온 게 그저 행운만은 아니길 바란다.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년에도, 다음에도 일상적인 교육적인 현장을 마주하고 싶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진심의 눈빛으로, 선생님을 존중하는 상식적인 행동으로, 교사를 신뢰하는 믿음의 목소리로 교실을 채우고 싶다.
▲ 지난 5일 오후 교사 집회에서 현직 교장 175명이 서명한 성명서가 발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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