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두 소년이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

조영준 2023. 8. 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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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277] 영화 <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

[조영준 기자]

 
 영화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스틸컷
ⓒ 와이드릴리즈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중년의 작가 히사(쿠사나기 츠요시 분)는 꽤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둔 것이 없다. 아내와는 헤어졌고, 어린 딸과도 자주 만나지 못한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지만 먹고사는 일에 쫓겨 다른 사람의 글을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렇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문학 작가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문학은 팔리지 않는 장르며 돈이 되지 않는다는 편집자의 아픈 소리만 듣게 될 뿐이다. 그러던 그의 눈에 방 안에 놓여있던 고등어 된장 통조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유년 시절의 잊지 못할 기억 하나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음식이다. 이렇게나마 글을 쓰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 기억이기도 한 1986년의 여름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영화 < 1986년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한 여름날의 추억이 남겨져 있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히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인 1986년을 배경으로 두 소년이 함께 떠나는 모험과 여정의 순간들을 그려낸다. 로드 무비 형식을 통해 이들의 우정과 성장을 담아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여름의 절정과도 같은 뜨거운 열정이나 화려한 시절의 거센 기운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천진난만하면서도 미숙한 시절의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정과 오해, 화해와 나아감의 지점에 놓이게 되는, 여름의 초입 혹은 끝자락의 모습을 닮은 순수하고도 가슴 따뜻한 이야기다.

02.
'내게는 고등어 통조림을 보면 떠오르는 한 아이가 있다. 아무리 나이가 든다 해도 그 여름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히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1986년 여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름 방학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던 어린 히사(반카 이치로 분)에게 같은 반 학생이었던 타케(하라다 코노스케 분)가 찾아와 부메랑 섬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해 온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망설이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돌고래다. 그 섬에 가면 돌고래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타케의 말 한마디에 히사는 동행을 약속한다.

사실 두 사람은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타케는 어딘가 모르게 또래답지 않은 모습을 가진 아이였다. 두 벌 밖에 되지 않는 러닝셔츠를 입고 학교를 다니면서 그 일로 놀림을 받아도 태연했고, 반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매일 책상 위에 물고기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집중하곤 했다. 반대로 히사는 글쓰기를 잘해 이때부터 벌써 선생님의 칭찬을 자주 받았고, 학교가 끝나면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무리 지어 다니며 놀 궁리부터 했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부메랑 섬을 향해 모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타케가 자신의 파트너로 히사를 선택한 이유는 지연되어 있다. 영화의 시작점은 이곳이지만 이야기가 나아가는 동안에 쌓이는 두 사람의 우정 위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이 이유 역시 그런 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히사가 이때를 생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된 짧고도 커다란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영화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스틸컷
ⓒ 와이드릴리즈
03.
영화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절반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모험으로 채워진다. 갑자기 떠나게 된 여행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 해가 뜨기 시작해서 지기까지 하루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쌓고 한 뼘 성장하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히사가 벽에 걸린 포스터를 뜯어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연예인의 초상을 스스로 벗겨내는 모습은 성장의 모티브로 받아들여진다. 부메랑섬에서 만나 도움을 받았던 유카 누나(카야시마 미즈키 분)의 영향이다. 이는 길 위에서 주운 100엔짜리 동전 하나를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던 세상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세상까지 발돋움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길 위에 놓인 두 소년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영화의 전반을 다루는 용법이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 두 사람의 모험 속에서 영화는 관객의 추론적 상상력을 십분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면의 있는 그대로를 전부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두 사람의 자전거가 내리막을 힘차게 내달리다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는 장면에서 상하로 굴곡진 도로의 형태를 잘 활용하여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도 제대로 표현해 내는 식이다. 모두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장면의 시작과 끝을 연결성 있게 잘 보여주는 것만으로 사람의 뇌는 하나의 장면을 잘 완성시키는데 이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극 중에는 이런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 소년에 해당하는 미성년자임을 현장에서 발생할 법한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고 안전을 도모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히사와 타케는 여정의 끝에서 자신들이 보고 싶었던 (히사는 그 돌고래를 붙들고 함께 수영을 하겠다며 굵은 로프도 챙겼다) 돌고래를 결국 만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 모험으로 인해 1986년의 여름 방학은 처음에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모습을 하게 되고, 고등어통조림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돌고래가 잠이 들면 물에 빠진다던 언젠가 히사의 말처럼 그날의 돌고래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물속으로 가라앉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대신 그 자리의 부메랑섬 해안가에서 두 친구의 따뜻한 여름이 시작된 셈이다.
 
 영화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스틸컷
ⓒ 와이드릴리즈
04.
모든 순간이 추억이 되어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간은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아마 대부분의 시간이 그럴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 안에 살아남게 되는 순간에는 어떤 특별한 감정이 놓여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날카롭게 벼려있거나, 아니면 다양한 감정이 엉켜 혼재되어 있거나 하는 식으로. 그렇지 않다면, 지금 히사가 기억하는 이 여름, '1986년 그 여름'의 시간도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옅은 기억으로 남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놓이게 되는 두 사람의 오해와 엇갈림, 이별의 이야기는 그런 역할을 한다. 단순히 행복하기만 했던 순간에 무거운 닿을 달아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만드는, 추억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 '그리고 고등어통조림'에 해당하는 일이다.

후반부의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테마는 오해와 화해다. 부메랑 섬을 다녀온 이후 여름 방학의 남은 시간 대부분을 함께 보내게 되는 두 소년은 사소한 오해로 인해 멀어지게 된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 정도의 이 작은 엇갈림은 히사와 타케라는 인물이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도드라지게 나타내는 대목이다. 타인의 상태나 의중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먼저 앞설 수밖에 없는 시절의 심리가 이 지점에서 정확하게 표현된다. 일련의 사건을 겪고 마을을 떠나는 타케 앞에 선 히사의 모습은 그래서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를 실은 기차가 떠나가 난 뒤에 아빠의 품에 안겨 한 번, 엄마의 품에 안겨 또 한 번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의 슬픔과 함께(그는 심지어 엄마 앞에서는 울지 않겠다고 아빠와 약속을 하고도 모습을 드러낸 엄마의 실루엣 앞에서 터져 나오는 슬픔을 결국 감추지 못한다. 엄마라는 존재 앞에 선 아이의 마음은 이토록 연약하다).

앞서 미뤄둔 이야기, 타케가 히사를 찾아와 여행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서도 영화는 잊지 않는다. 극의 처음에서 타케의 러닝셔츠를 놀리던 반 아이들이 다 같이 몰려가 쓰러져가는 그의 집을 보고 놀리는 장면이 시작이다. 그 무리 중에서 히사만이 유일하게 웃고 놀리지 않았다고 타케는 담담하게 말한다. 그동안은 보이지 않고 감춰져 있던 타케라는 아이의 심리와 서사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러닝셔츠가 두 벌 밖에 없다고 놀려대는 아이들 앞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던 아이가 고작 그런 이유로 히사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던 마음. 나는 이 영화가 기저부에 깔고 있는 이런 서사의 뿌리들이 작품 전체를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스틸컷
ⓒ 와이드릴리즈
05.
이 작품이 안고 있는 모든 이야기의 마침표가 되는 것이 바로 고등어통조림, 극 중의 장면으로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고등어 통조림 초밥'이다. 타케가 히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직접 만들어주는 이 음식은 우정의 증표이자 유대 관계의 표식과도 같다.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모두와도 같은 이 음식은 이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히사가 타케를 기억하는 대상이 된다. 방 안에 놓여 있던 고등어 통조림에서, 타케가 만들어준 고등어 통조림 초밥으로, 다시 타케와 함께였던 여름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순서의 역행은 영화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던 추억이라는 것이 타인의 자리로 전이될 수 있고 또 다른 모습의 기억이 되어 세상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이 영화를 바라보며 공감할 수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시간에 그 공간에 놓여 있지 않았더라도 관객들은 각자의 오랜 시절 속에 묻혀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기억을 두 소년의 기억과 서로 빗대어 보며 일부는 자신의 추억으로부터, 또 일부는 히사와 타케의 모습으로부터 감정을 불러낸다. 그리고 이 작품과 우리는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지나온 시간 속에 이런 기억 하나 정도 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삶은 충분히 행복하고 또 충만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오래 만날 수 없어도, 또 이제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어도 그렇게 연결된 채로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며 살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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