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국회에 법안 1만6천건이 잠들어 있다

"분양받은 아파트 실거주 의무가 풀린다."

지난 1월3일 국토교통부 2023년 업무계획 발표에 관한 반응이다. 부동산 시장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실거주 의무가 폐지되면 분양 아파트에 바로 입주하지 않아도 된다. 임차인에게 전세를 내줄 경우 자금 부담에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집을 사고자 하는 이에게는 솔깃한 선택지가 열린 셈이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도록 실거주 의무 폐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5월30일 국토교통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이후에는 국회 논의조차 감감무소식이다. 정부 발표를 토대로 자금 계획을 세웠던 이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상황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해당 법안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제21대 국회는 내년 5월29일 임기가 만료한다. 이때까지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법률안은 자동 폐기된다. 국회에 묶여 잠자고 있는 법안이 실거주의무폐지법 하나뿐이겠는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4일 현재 국회 계류 법안만 1만5913건에 이른다. 행정안전위원회는 2240건, 보건복지위원회는 1728건, 환경노동위원회는 1392건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도 모를 수많은 법안이 지금도 쌓여가고 있다.

LH 아파트 철근 누락, 오송 지하차도 참변 등 관심의 초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의원들은 경쟁적으로 관련 법안을 쏟아낸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지만, 처리하지 못한 법안이 1만6000건에 가깝다. 국회는 밀린 숙제를 해소할 수 있을까.

국회의사당 앞 교통 신호등이 일제히 빨간불을 가리키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8일은 절기상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다. 정치에도 계절이 있다. 오는 9월1일 시작하는 정기국회는 ‘가을걷이’ 기간이다. 새해 예산안 처리, 주요 입법 과제를 마무리해야 할 중요한 시기다.

올해 정치 상황을 보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제21대 마지막 정기국회라는 엄중한 현실을 잊은 듯하다. 내년 봄이면 자기 가슴에 부착된 의원 배지를 떼야 할지도 모르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의지도 절박감도 보이지 않는다.

국회의원 본연의 입법 과제 수행보다는 내년 4월10일 제22대 총선에 시선이 꽂혀 있기 때문이다. 자기 공천을 둘러싼 정치 공학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다 보니 법안 처리는 관심의 뒷전이다. 의견이 엇갈리는 법안을 통과하려면 반대 진영 설득에 공을 들여야 하는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협치’라는 단어는 여의도 정가에서 이미 잊힌 존재가 되고 있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예술이라는데 현실은 암담하다. 정국의 가파른 대치전선 속에서도 교집합을 찾는 물밑 노력이 이어져야 접점도 확대되지 않겠는가. 여야 지도부는 그런 노력을 하고는 있는 걸까. 산적한 민생현안을 이번 정기국회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법으로 신분을 보장하고 국민 혈세로 예산까지 지원하는 이유를 모르는 국회의원이라면 배지를 달고 다닐 자격이 없다. 국회의원을 일컬어 걸어 다니는 헌법기관이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국민의 대표자라 하겠는가. 자기 존재 이유를 곱씹어 본다면 다가오는 ‘정치의 계절’에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류정민 이슈1팀장 jmryu@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