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지옥문이 열렸나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신곡』 첫머리에 나오는 지옥문에 적힌 글귀다. 희망은 말라버렸고 절망만 득시글대는 곳, 물과 불의 무한고통 속에 갇힌 곳에 대한 경고다. 그 지옥문이 열린 것일까. 지난 주말 우리 사회는 매우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살이 녹는 듯한 된더위와 꼬리에 꼬리를 문 ‘묻지마’ 살인 예고, 거기에 우왕좌왕 새만금 잼버리 대회까지 불쾌지수만 높이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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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염, 살인예고, 잼버리 파행 악몽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게 절망인가
드라마 ‘DP’의 질문, 국가 책임은?
」
기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금요일 무장경찰이 배치된 잠실역을 지나며 나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됐다. 혹시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웃을 위협 대상으로 느끼는 사회, 각자도생의 생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폭염 탓으로 돌렸다. 더위가 걷히면 좋아지겠지, 낼모레면 입추(立秋·8일)인데, 하는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불타는 지구촌은 내년에도 찾아오리라. 기상전문가에 따르면 지구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이를 막을 특단의 대책이 있을지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군대 폭력을 다룬 화제의 드라마 ‘D.P. 시즌2’의 “결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이 절박하게 다가왔다.
무엇을 할 것인가. 소설가 김기창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 절망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좋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두려움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아직 최악은 오지 않았다, 더 혼나봐야 안다는 것이다. 폭염의 안팎을 파고든 단편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에서다.
소설 속 세상은 평균기온 최고 54도, 체감온도 73도다. 국가가 기후 대책을 미루고 미루는 동안 세상은 열탕처럼 끓어 올랐고, 짙은 미세먼지가 사람들 숨통을 조이게 됐다. 대안으로 만든 게 ‘돔시티’다. 높고 단단한 벽을 두르고, 하늘에 투명광 패널을 덮었다. 깨끗한 공기와 자동 온·습도 장치를 갖췄다. 반면에 그곳은 특권 지역, 인종·종교·재산 등에 따라 거주자와 추방자로 갈린다.
추방자들은 태양을 피해 땅속 동굴을 짓고 산다. “가족이나 연인,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가까이 붙어 지내지 않았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타인이 뿜어내는 열기까지 군말 없이 참아내던 사람들은 말라 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요즘 속출하는 기후난민을 보는 듯하다. 그렇다고 돔시티 주민들이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다. 추방자들과 얽힌 수치심과 죄악감을 씻을 수 없어서다.
기후재앙, 딱히 대안이 없다. 환경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각성, 탄소배출 절감을 향한 연대와 노력뿐이다. 가장 큰 적은 기후 불감증이다. 특히 공동체 회복이 최우선이다. 양극화가 사회를 무너뜨리는 최악의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폭염사회』에 따르면 미국 내 폭염 사망자는 인종차별 및 불평등 지도와 일치했고, 또 똑같이 열악한 지역이라도 이웃 간 네트워크가 살아 있는 곳에선 그 피해가 확연히 작았다.
생태예술가 정재철의 타계 3주기를 기리는 ‘끝나지 않는 여행’(26일까지 서울 금산갤러리)에서 특별한 작품을 만났다. 작가가 2017년 제주 해역에서 건져올린 플라스틱 음료병·삼푸병·샌들 등 갖은 쓰레기를 표기한 ‘제주일화도’ 지도다. 불(火)과 꽃(花)을 이어서 새로 만든 한자 ‘화’가 각별했다. ‘불의 세상’을 ‘꽃의 세상’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이렇듯 기후재앙을 넘어서려면 작은 것 하나라도 아끼고 사랑하는 예술적 상상력이 기본이다.
제주 쓰레기처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모인 것이다. 남을 탓해선 결코 좋은 나를 만들 수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잼버리 파행 운영을 놓고 또 전임 정부를 탓하는 소리가 들린다. 안 될 일이다. 12일 행사가 끝나면 책임소재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구렁이 담 넘듯 얼버무리면 안 된다. 게다가 이번엔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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