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광장 살인 운전 사건, 아무도 '묻지마'라 안 했다
[이정환 기자]
▲ 1991년 10월 21일자 조선일보 보도. |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여섯 살 어린이, 열 두 살 어린이,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21명을 쓰러뜨리고 자전거 보관소에 있던 자전거 20여대와 충돌했다. 이어 유아용 놀이자동차를 들이받고 나서야 멈춘 차안에서 한 젊은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자신을 제압하려는 시민들 사이에서 그는 품에 있던 칼을 들고 인질극을 벌이며 저항했다.
시민들과 몸싸움 끝에 잡힌 그의 입에서 나온 말도 끔찍했다.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잃고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는 그는 세상을 증오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안에서는 세상을 원망하는 내용의 글이 발견됐다. 최근 발생한 분당 차량·흉기 난동 사건과 맞물려 다시 회자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나무위키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훔친 차량으로 질주해 묻지마 살인을 저질러 2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
▲ ‘오리역 부근에서 칼부림을 하겠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경찰도 죽이겠다’는 범죄 예고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가운데, 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 입구에 경찰특공대 전술장갑차가 배치되어 있다. |
ⓒ 권우성 |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사건에 '묻지 마'와 같은 관행적 용어를 언론은 붙이지 않았다.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여의도 광장 살인운전(한겨레)', '여의도 광장 살인질주(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으로 지칭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묻지마 범죄'는 무동기 범죄 또는 이상동기 범죄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체적인 동기 없이 범행 대상이 뚜렷하지 않거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벌이는 범죄를 국내 언론이 '묻지마 범죄'란 말로 상용화한 것은 여의도 광장 차량 난동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도 한참 후인 2003년 2월부터였다.
각종 포털 뉴스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종이 신문 아카이브 서비스)' 등을 살펴보면 범죄 보도를 하면서 언론이 '묻지 마'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2002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 보도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아일보>는 미국 워싱턴 일대에서 발생한 연쇄 총기 저격 사건을 전하면서 '묻지 마 저격'이라고 전했다.
이를 모방한 듯 보이는 사건이 다음해 2월 국내에서 발생했다. 부산 진구 백양터널 출구 지점에서 승용차 2대에 잇따라 실탄이 사격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한겨레>가 2003년 2월 11일자 기사를 통해 '묻지마 총격'이라고 전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일어난 사건이 대구지하철 전동차 방화사건이다.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을 계기로 "최근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잇따라 발생해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와 같은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최근 분당 차량·흉기 난동 사건이나 신림 흉기 난동 사건의 경우를 통해 나타나듯 이와 같은 '묻지 마 보도'는 여전하다. 국가 통신사인 <연합뉴스>를 비롯해 여전히 많은 매체들은 이들 사건을 전하며 '묻지마 흉기 난동', '묻지마 칼부림 사건', '묻지마 테러' 등 용어를 사용했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2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무책임한 보도 관행이다.
▲ 1991년 10월 20일자 한겨레 보도 |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우선, 범행을 '묻지마'와 같은 표현을 사용해 전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실적이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용어다. 학술적인 용어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용어 역시 물론 아니다.
더구나 '묻지 마'라는 표현은 실상 그 말 자체가 가해자(의도)에만 초점이 맞춰진 용어다.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의 피해자는 대학 입학 때부터 과외나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열심히 산 청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흉악한 범죄의 피해자가 된 이유는 단지, 저렴한 원룸을 알아보려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것뿐이었다. 6일 사망한 분당 차량·흉기 난동 사건 피해 여성의 경우 역시 외식을 하기 위해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용어다. 대체, 무엇을 묻지 말라는 것인가.
이렇듯 '묻지마 범죄'란 말은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이나 분당 차량·흉기 난동 사건 등의 심각성을 전달하기에 '심각하게' 부적절한 용어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사건의 심각성이다. 보도에 따르면 경찰이 검거한 이른바 '살인예고글' 작성자가 46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건의 심각성이 제대로 사회에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건의 심각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범행의 구조적 원인 또한 제대로 드러나기 어렵다.
1991년 10월 그 끔찍한 오후 이후, 여의도 광장 차량 난동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서울시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안전 관리에 대해 서울시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1995년 2월 26일, 사건 발생 3년 4개월여 만에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여의도광장은 많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므로 관리를 맡은 서울시는 마땅히 자동차가 광장 안으로 무단출입하지 못하게 바리케이드를 세우거나 경비원을 뒀어야 했다."
'묻지마 범죄'와 같은 용어에 묻히기 쉬운 사회적 책임이 세상에 드러났던 셈이다. '묻지마 범죄'와 같은 보도 관행이 사라져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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