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바비'의 원형은 독일 담배가게 외설 인형(上)
태생적으로 배반(背反)의 인형인 '바비'
시대 초월할 만큼 완벽한 외형, 반면 켄은…
그레타 거윅 감독의 '바비'는 인형과 현실 세계의 교차로 자조적 철학을 설파하는 영화다.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갖가지 요소들이 뚜렷한 교훈과 메시지에 전복돼버린다. 이마저도 구시대적이고 다양성 문제가 더해져 아이러니하게 나타난다. 인형 세계의 주인만 달라질 뿐 고압적 시스템은 사실상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바비는 태생적으로 배반(背反)의 인형이었다. 1959년 뉴욕 토이 페어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회의적 시각에 시달렸다. 페티시즘의 상품화를 관념적으로 상징하고, 젠더의 정의를 고정하며, 이성애의 절대적 우의를 가리킨다는 비판이었다. 키가 크고 깡마른 바비는 가슴이 지나치게 크고, 엉덩이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이며, 발 모양은 하이힐에 최적화돼 있다. 소녀들이 이상으로 삼기 시작한 순간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바비는 1950년대 말 루스·엘리엇 핸들러 부부가 만들었다. 딸 바브라의 이름을 따 바비라 명명했다. 원형은 독일 담배 가게에서 남성을 위해 판매되던 외설스러운 인형 '릴리.' 핸들러 부부는 쇼핑하다가 마주하고 바브라가 종이로 된 성인 여자 인형을 갖고 놀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내 어린 소녀를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보자고 합심했다. 소녀들이 아기를 돌보는 미래의 어머니가 아닌 성숙한 젊은 여성의 모습을 상상하길 바랐다.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59년 첫선을 보였다.
*릴리는 독일 신문 빌트 차이퉁에 실린 만화 속 인물에서 따온 인형이다. 포니테일(긴 머리를 뒷머리 위쪽에서 리본 따위로 묶고 머리끝을 망아지 꼬리처럼 늘어뜨린 머리 형태) 머리를 하고 하이힐 등 다양한 의상을 착용했다. 만화에서는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채 남자에게서 돈을 빼앗는다. 인형 제작사는 성인 남성이 자가용 계기판에 놓거나 여자친구에게 꽃이나 초콜릿 대신 선물하도록 설계해 만들었다.
*루스는 포르노그래픽한 풍자만화를 누구나 사랑하는 미국 여자아이로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 잭 라이언을 기용했다. 할리우드 배우 자자 가보 등 여러 여성과 결혼했던 플레이보이다. 냉전 시대에 호크 미사일과 스패로 미사일을 고안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핵전쟁으로 인한 멸망의 공포가 지배적이던 시기에 바비는 번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동시에 보장했다.
*핸들러 부부는 바비를 미국 시장에 내놓기 전에 섹시한 이미지를 최소화했다. 하지만 내심 어느 정도 전달돼 미국 신세대 아이들의 눈에 띄기를 바랐다.
*바비가 오랫동안 인기를 누린 근본적 이유는 '성인'의 특징을 가진 데 있다. '틴에이저'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시대에 사실상 최초의 '틴에이저' 인형으로 발매됐다. 미사일 같은 유방은 환상적이고 에로틱해 바비가 이상적 신체로 어필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물론 노골적으로 드러난 섹슈얼리티는 인형에 대한 이미지에 흠집을 냈다. 미술사가 캐롤 오크먼은 '바비, 부그로와 만나다: 20세기 후반의 이상적 신체 만들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핸들러 부부가) 1959년 뉴욕 토이 페어에서 바이어의 의견을 따랐다면, 원래 핀업 걸로서 미사일 같은 유방을 가진 바비는 스타덤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마텔사의 최대 고객인 시어즈는 바비 구매를 단호히 거부했고, 지나치게 관능적이라고 비난했다.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완구점 선반에서 바비를 본 소비자였다. 원형인 릴리와 달리, 바비는 섹스 없는 섹슈얼리티를 표현했다. 바이어를 두렵게 한 것은 현실, 즉 어른에게 성이 있다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섹슈얼리티가 분명 신체의 일부로 나타나는 성인 인형을 디자인할 때, 성의 문제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50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수중에 돈을 갖고 소비하는 어린이들이 존재한 시대다. 발 빠른 제조업자들은 텔레비전, 라디오를 통해 상품을 선전했다. 이전 세대 아이들과 달리, 이 세대 젊은이는 생산자라기보다 소비자인 경우가 더 많았다. 바비 같은 당당한 독신이 등장하자 구식의 아기인형이나 땅딸막한 어른 인형에 만족하지 않았다.
*1950년대 대중문화에서 도드라진 특징은 어떤 유형의 여성이든 결국에는 똑같은 것을 원했다는 점이다. 진취적으로 보이는 여주인공조차 섹시한 라이벌을 질투했고, 가슴을 크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은막의 섹시한 여배우들은 대체로 사회적 또는 성적 평등을 구하지 않았다.
*역사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스테파니 쿤츠는 마텔사에 대해 "부모의 견해와 반대되는 방향에 선 과격한 혁신주의자들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마텔사는 딸뿐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바비의 매력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바비의 개성이 1950년대의 성역할 규범과 성도덕에 근본적으로 합치된다는 것은 어머니들이 바비를 마음 편히 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딸이 바비 옷이 얼마나 멋진지 얘기하는 것을 듣고 마음을 바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인형을 사준 어머니 이야기에서, 광고 컨설턴트 어니스트 닉터는 '이 인형을 갖고 놀면서 아이는 적절한 옷에 대한 중요성을 알게 된다'라는 데 초점을 맞춘 전략을 발전시켰다. 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소녀가 '작은 숙녀 같은 포즈'를 취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섹시함이 필요했는데 어머니들 대부분은 기쁘게 양보했다."
*완구 업계는 애초 바비의 섹시한 이미지를 받아들이길 주저했다. 하지만 바비가 구매자의 이목을 끌고 마텔사의 영입전략으로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태도를 달리했다. 가장 주효한 홍보는 TV 프로그램 '미키 마우스 클럽'에 내보낸 광고였다.
*바비는 140개국에서 판매된다. 미국 스미소니언에 따르면 출시되고 30년간 판매된 바비를 일렬(머리 위에 작은 발을 맞대어 배열)로 놓은 거리는 지구 네 바퀴가 넘는다. 바비는 세계에서 1초에 두 개 정도 판매된다. 미국 소녀(3~10세)들은 평균 열 개를 소유하고 있다.
*켄은 1961년에 등장했다. 바비처럼 핸들러 부부가 자녀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애석하게도 켄은 거세됐다.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인 거투르드 스타인의 격언을 빌리자면 "거기에는 그것이 없다."
*켄은 일편단심으로 바비 곁에 인내심 있게 서 있다. 둘은 커플이지만, 결혼할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결혼 예복을 입은 적은 있다.
*루스는 논쟁을 좋아하는 진지한 여성이다. 그는 1916년 폴란드에서 이주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 태생 1세대라서 아메리칸 드림을 신봉했다. 루스는 페미니즘 이전 시대부터 기업가로서 긴 경력을 쌓았다. 중요한 사업회의장에 참석한 유일한 여성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텔사는 설립 초기부터 여성에게 이전에 볼 수 없던 기회와 책임을 주었다. 루스는 인종차별 철폐가 널리 인정되기 전부터 이런 방침을 취했다고 자신한다. '바비 이야기'의 저자 가운데 한 명인 스티븐 C. 더빈은 그를 "프랭크 시나트라와 대부호 리오나 헬름슬리를 둘로 나눈 듯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루스는 1974년 우편 사기와 공모,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마텔사 소득을 허위로 신고했다는 혐의 등으로 소송에 휘말렸다. 결과적으로 무거운 벌금과 함께 집행 유예와 지역 봉사 판결이 내려졌다.
*루스는 마텔사를 떠난 뒤 자연스러운 외양과 촉감을 가진 유방용 보철 '니어리 미'를 개발했다. 유방암 환자였던 그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바비를 생각할 때, 나는 어린 소녀들이 유방이 있는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이 자기평가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유방을 잃은 여성들에게 자기평가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알게 됐다."
*바비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순응성이 꼽힌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한계도 있다. 스미소니언은 머리 없는 인형의 가슴에서 엉덩이까지 파란 선이 그어져 있는 마텔사의 바비 노출계를 기사로 다룬 적이 있다. 새로운 의상은 이 기준에 맞춰지고 파란 선이 보이면 거절당한다. 외모가 얌전치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치마 길이 검사를 받는 처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바비를 수집하는 남성 가운데 상당수는 게이다. 한동안 바비를 취미로 수집한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제2의 커밍아웃으로 여겨졌을 정도다. 대부분 자신이 게이임을 먼저 털어놓고, 바비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게이 공동체와 마텔사 간 관계를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마텔사는 1994년 게이 성향 잡지 장르가 첫 데이트에 관한 기사 삽화에 켄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편집부는 켄의 모습을 지우고, 그 윤곽만 살렸다.
*바비는 1960년 말에 이르러 흑인 친구를 가졌다. 1980년대부터는 바비 스스로 다양한 피부색을 갖게 됐다.
*1965년 와츠 폭동 뒤 로스앤젤레스에 설립된 흑인 소유의 신다나 완구회사는 마텔사로부터 눈에 띄지 않게 많은 지원과 경영 노하우를 지도받았다.
*복수 예술가들은 바비를 통해 현대 성역할 분담의 어두운 면을 탐구했다. 영화 '캐롤(2016)', '아임 낫 데어(2008)' 등을 연출한 토드 헤인즈 감독이 대표적 예다. 1987년 '슈퍼스타: 더 카렌 카펜터 스토리'에서 바비를 통해 거식증으로 사망한 가수 카렌 카펜터를 묘사했다. 시나리오 공동집필자인 헤인즈와 신시아 슈나이더는 햇빛이 밝게 비치는 캘리포니아주 교외 마을 다우니의 모습을 능숙하게 파고들었다. 인형의 눈을 통해 넌더리 나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족의 삶을 드러냈다. 이 영화는 카펜터 가족과 A&M 레코드사의 압력으로 일반에 공개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개 바비를 찬양하거나 혐오한다. 중간 입장은 거의 없다. 특히 1995년 쿠웨이트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바비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짧은 치마를 입은 서양 여성들을 추방했다.
*바비의 가슴은 기획 초부터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됐다. 일본의 인형 제작자가 견본(見本)에 계속 유두를 만들자, 마텔사는 이를 제거해 되돌려 보냈다. 디자이너 라이언이 직접 손톱 줄로 유두를 긁어내 매끄럽게 만들었다.
*켄의 신체는 1961년 발매되고 두 차례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반면 바비는 1959년 뉴욕 토이 페어에 처음 등장한 이래 큰 변화를 거치지 않았다. 매번 시대를 초월할 만큼 완벽하다고 평가됐다.
*미술사가 캐롤 오크먼은 1996년 윌리엄스대에서 가진 전위미술 세미나에서 '이상적인 신체: 현대의 누드와 그 딜레마'에 대해 강의했다. 학생들에게 바비에 관한 문헌뿐 아니라 케네스 클락의 고전서 '누드론: 이상적 형태 연구'를 읽도록 했다. 바비의 신체가 이상적인, 즉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했다. 그는 바비와 켄의 나체를 선입견 없이 살펴보고, 과거의 회화나 조각의 누드 상과 비교했다. 이를 통해 전통적 인체묘사에 내포된 의미를 깊이 고찰하는 한편 바비의 신체가 시간을 초월하면서도 동시성을 갖는 모순에 관해 설명했다.
참고 자료 : 요나 젤디스 맥도너·스티븐 C. 더빈·앤 뒤실·데니스 뒤하멜 등 지음·김숙 옮김·발행처 새움 '바비 이야기(2003)', 스티븐 C. 더빈 지음·김숙 옮김·발행처 모리스 '내 어릴 적 바비(2007)'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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