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눈물... '닥터 후' 70년, 가장 사랑 받은 에피소드

김성호 2023. 8. 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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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20] <닥터 후> 뉴 시즌 5 에피소드 10

[김성호 기자]

오르셰 미술관 반 고흐 전시실에서 한 사내가 묻는다.

"미술사에서 반 고흐가 차지하는 의미가 어떻게 될까요?"

질문을 받은 이는 전시실의 도슨트, 반 고흐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다. 그가 사내에게 답한다.

"중요한 질문이군요. 틀림없이 가장 유명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가장 사랑받는 화가일 겁니다. 색을 다루는 감각이 매우 뛰어나기도 하고, 찢어질 듯한 삶의 고통을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바꿔놓았죠. 앞으로도 그런 작품은 나오지 못할 겁니다. 단지 최고의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예술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 닥터 후 뉴 시즌 5 포스터
ⓒ BBC
 
70년 된 드라마, 가장 사랑받는 에피소드

애정이 듬뿍 담긴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사내 앞으로 다른 사내가 가만히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들어온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백여 년 전 살다 간 위대한 화가다. 그가 시간을 가로질러 제 작품이 내걸린 오르셰 박물관에서 저에 대한 평가를 마주하는 것이다.

끝끝내 제 성취에 마땅한 평가를 받아들지 못한 불운한 화가가 시간을 건너 결코 잊지 못할 순간과 만나는 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마 <닥터 후>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받는 에피소드가 뉴 시즌 5, 10번째 에피소드가 되겠다.

도슨트의 말 그대로다. 고흐는 이 시대 가장 유명하며 또 가장 사랑받는 화가다. 세상 어디에서나 그의 작품, 이를테면 <별이 빛나는 밤>이나 <해바라기> <아를의 방>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아몬드나무> 여러 인물그림과 자화상까지를 만나볼 수 있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도 고흐 특유의 화풍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후기 인상주의를 넘어 시각예술 그 자체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은 고흐의 삶은, 그러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 또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가장 널리 사랑받는 화가와 만나다
 
▲ 닥터 후 스틸컷
ⓒ BBC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고, 평생의 짝도 아이도 갖지 못한 삶이다. 끝까지 저를 지지해준 동생 테오에게도 일평생 짐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심지어 동료 예술가들과의 교류까지 좌절되니 그의 삶은 철저히 외로웠다 하겠다. 고흐를 떠올리며 그가 겪은 불행을 생각하게 되는 건 그래서 자연스런 일이다.

이야기는 오르셰 미술관에서 시작된다. 에이미(카렌 길런 분)와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던 닥터(맷 스미스 분)가 그림 속에서 무언가 낯선 존재를 발견한다. 그림 속 교회당 창문 안에 무언가 불온한 존재가 비쳤던 것이다. 닥터는 곧장 에이미와 함께 그림이 그려지기 전의 어느 날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닥터와 에이미, 고흐의 만남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고흐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모습,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꿋꿋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성실한 작가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괴짜인데다 별 볼일 없는 무명 화가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이나 그릴 뿐, 그는 술을 퍼 마시고 실수를 반복하는 주정뱅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세상을 남다르게 바라보는 눈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 뿐 아니라 그 이면까지 인식할 수 있는 섬세함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우주의 괴수까지 꿰뚫어볼 정도로 발달해 있다. 덕분에 인간을 습격하는 그 존재와 맞서게 된다. 평범한 이들의 눈엔 그저 미치광이처럼 보일지라도 닥터와 에이미는 고흐의 능력이 진짜임을 분명히 안다.

불운한 예술가가 마땅한 평가와 만났다면
 
▲ 닥터 후 스틸컷
ⓒ BBC
 
드라마는 닥터와 에이미, 그리고 고흐가 사람들을 위협하는 우주 괴수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다. 시즌 5의 주된 내용과는 따로 노는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이 에피소드는 이 드라마의 전체 역사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관심을 받는다. 그건 드라마 속 고흐의 존재, 또 그가 제가 받아 마땅한 찬사를 마침내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 덕분이다.

사람들은 안다. 닥터와 에이미가 만난 고흐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른일곱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화가의 결말을, 그리고 사망 뒤에야 주어지는 명성을 드라마를 보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의 방엔 팔리지 않은 수많은 작품들이 내걸려 있는데, 시청자들은 그 그림들이 훗날 어떤 평가를 받는지도 안다. 모든 성공은 그의 사망 뒤에야 이뤄지니, 고흐의 삶은 가혹하다고 느껴질 만큼 불운하게 보인다.

그가 만약 제가 거두는 성과를 알게 된다면, 현생에서 그가 겪어야 할 고통도 조금쯤은 나아지지 않을까. 이 드라마가 고흐에게 내어주는 것이 꼭 그와 같다. 그토록 위대한 작가는, 일생을 제 불운과 맞섰던 화가는 제게 마땅한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 짜릿한 순간을 끝끝내 선사하는 것이다. 오르셰 미술관에 내걸린 저의 작품들과, 또 제게 주어지는 평가를 마주하는 고흐의 표정을 상상해보라. 드라마를 본 이들이 쉬이 잊지 못할 감동을 받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으리라고
 
▲ 닥터 후 스틸컷
ⓒ BBC
 
일찍이 고흐는 제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살아 있는 동안 그림값을 많이 받아보지 못한 화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느냐고, 그러나 죽고 나서 나중에 그림값이 높아진 화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느냐고 말이다. 그는 그것이 튤립의 가격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던 네덜란드 튤립파동과도 같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화가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이죠. (중략) 그들은 튤립처럼 사라져갈 거예요.'

그러나 그는 이어 적는다. '튤립파동은 오래 전에 잊혔지만, 꽃을 재배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겁니다'라고.

시공간을 가로질러 우주의 괴물들과 맞서는 <닥터 후>가 여적 많은 이들에게 멋진 드라마로 기억되는 건 이와 같은 순간 덕분이 아닌가 한다. 이 드라마가 되살린 수많은 인물, 이를테면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 또 애거서 크리스티와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작가들이 오늘의 시청자들에게 특별한 감상을 일으켜왔던 것이다. 시간을 건너 제 작품으로 이후 세대에게 영감을 주어온 많은 작가가 제가 해낸 업의 가치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예술에 누군가의 삶을 바꿔낼 수 있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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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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